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8. 비정상이 정상을 대신하는 이상한 이곳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려면, 승기야, 맑은 수정체에 담긴 순도 100%의 아름다운 이상을 버려야 해. 더는 통하지 않으니까. 앞으로 우현이를 만나서 하려는 일은, 네가 말하는 순리를 거스르는 행동일지도 몰라. 혹시 그렇더라도, 다른 말하기 없기다. 그리고 꼭 알았으면 하는 게 있는데,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나도 우현이도 아닌 승기 너야.
“얘들아, 오래 기다렸어?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 라테? 아니면 차?”
방실방실 웃으면서 다가온 우현이. 중국에 다녀온 후 2개월이 지났다. 먼저 연락하고 싶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참았다. 부탁하는 처지다. 승기에게는 어쩌면 우현이가 마지막 동아줄일지도 모른다. 우현이의 심기[125]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우현이의 분위기가 변했다. 살이 좀 쪘나? 아닌가? 이전과 다르게 편안함과 여유가 묻어 있다.
“너희들 계좌번호 좀 불러.”
“우현아, 갑자기 계좌번호는 왜?”
“효상아, 그냥 형이 하라는 대로 해. 계좌번호가 뭐야?”
9. 승기는 아무 말이 없다. 보통은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전세사기 이후로 서로 대화는 했나? 승기에게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지금은 승기의 매운 두리안 맛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주위를 맴돈다. 어랏? 몸이 으스스하다. 기분 탓이다. 하지만 무언가 터질 것 같다. 눈동자가 내 지시와 관계없이 승기를 향한다. 승기의 입술이 떨린다. 말을 하려는 것 같다. 굳게 포개진 입술이 떨어진다. 곧 승기의 목소리가 들리겠지. 불안하다. 승기가 또 비판적으로 말할까 봐. 불안하다. 정말로. 승기야. 제발. 좀.
“우현아, ○○ 은행, xxx-xxx-xxxxxx”
엥? 정말로? 이렇게 군소리 없이? 우현이 말대로? 승기가? 둘의 관계가 미묘하게 변한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나? 놀랍다.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 된다. 나도 가세해야 한다.
“우현아, ○○ 은행, xxx-xxx-xxxxxx,”
문자가 온다. 스팸이겠지. 아니다. 은행에서 온 문자다. 숫자가 보인다. 숫자가 너무 크다. 이게 얼마야?
입금
10,000,000원 입출금(8284) 12.22 21:00
임우현
핸드폰을 열어 은행 앱에 들어가 계좌를 확인한다. 우현이가 보낸 돈이다. 그것도 천만 원을. 승기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 승기도 핸드폰만 쳐다본다. 우현이가 우리에게 왜 돈을 보내지? 알 수 없다. 우현이는 엄청난 비밀을 말하고 싶어서 미칠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얘들아, 방금 보낸 돈은 사업을 위한 착수금이야. 말이 착수금이지. 그냥 너희 생활비야. 효상이는 글 쓴다고, 요즘 벌이가 없잖아. 당분간 이것으로 버텨. 승기 역시 안 좋은 일 당했으니까, 이 돈은 월세에 보태. 그리고 프로젝트와 관련한 착수금은 이미 따로 마련했어. 그리고 매달은 아니지만, 수익이 생기면 그때마다 너희 몫도 있을 거야. 그러니 방금 보낸 돈은 그냥 편하게 써. 그렇다고 허투루 쓰란 소리는 아니다. 우리 사업이 언제 수익 궤도에 오를지 알 수는 없으니까.”
10. 뭐, 우현아? 천만 원을 그냥 준다고? 아무런 대가 없이? 승기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현이를 바라본다. 사실, 승기와 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통장에 친구의 이름이 찍힌 게 처음이라서다. 우리 셋은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 말은 안 하지만 불문율[126]이다. 서로 용돈을 주는 사이는 더욱더 아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서로의 기념일을 챙긴 적은 있던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현이와 승기한테 생일 선물을 준 기억도 받은 기억도 없다. 대박! 방금 기억이 났다! 우현이가 결혼할 때도, 승기가 결혼할 때도, 난 축의금을 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긴 우현이와 승기도 내게 축의금을 보내지 않았다. 누구보다 친한 셋이라 여겼거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챙겨주지 않아도 될 만큼 하나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서서히 멀어지는 관계를 모른 척했을까? 얼마 전 승기가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한 게 처음이었다. 승기가 새벽에 돈을 빌리러 내게 오는 상황을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놀라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승기가 부탁하기까지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지는 승기 주위에 떨어진 담배꽁초만 보아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우현아, 너무나 고마워. 네 진심을 의심하지 않아. 내가 그럴 상황도 아니고. 너무나 기뻐. 네 말대로 당분간 월세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다만, 천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야. 친해도 선뜻 줄 수 있는 돈은 아니라고. 우리가 그동안 돈거래를 한 기억도 없고. 그냥 받을 수는 없어. 돈을 떠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야? 방금 말했지만, 더는 의심하지 않아. 너를 도와서 사업을 잘 이끌고 싶은 마음뿐이야.”
“얘들아,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우리가 시작하려고 하니까. 관우, 장비, 유비가 집 뒤뜰에서 의형제를 맺은 일 기억나지? 그 도원결의를 우리는 이곳에서 시작하려 해. 다들 가까이 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말 끊지 말고 집중해.”
11. 우현이가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던가? ‘입이 귀에 걸려있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우현이는 몸소 실천 중이다. 웃음소리가 카페를 떠나지 않는다. 우현이의 표정을 분명히 어디서 본 듯하다. 기시감[127]일까? 아니면 미시감[128]일까? 둘 다 아닌 것 같다. 분명히 어디서 본 표정이다. 그래! 기억이 났다! 어렸을 때, 종종 할아버지 무릎에 누워서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었다. 수많은 무용담이 할아버지의 경험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저 난 할아버지 무릎이 좋았을 뿐이다. 할아버지 무용담은 그 어떤 수면제보다 강력한 자장가여서다. 헌책방에서 은은하게 낡은 한지의 향을 풍기는 할아버지의 체취와 어우러지는 게 행복했을 뿐이다. 깔쭉깔쭉한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을까? 달그락달그락 쇳소리를 고명 삼아 사각사각 쉰 소리를 내던 할아버지가 그립다. 지금 우현이의 모습은 영락없는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다.
“얘들아, 믿어져? 정말 로또와 같은 일이 우리 앞에 놓였다고! 지금 말하면서도 손에 땀이 흥건해. 그동안 우리 셋, 정말 순진하고 순수하게 살았어. 우리끼리 아웅다웅 다투면 뭐 해? 그렇다고 해결이 돼? 답도 없잖아. 어차피 돈을 버는 사람은, 어차피 행복한 사람은 따로 있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휩쓸리는 거라고. 결국에는 빈손에 흥건하게 묻은 후회의 땀만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전부라고.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안 그러냐? 승기 그리고 효상아! 하하하. 아!! 진짜 행복하다!!!”
12. 우현이의 이야기를 솔직히 믿어야 할까? 듣고도 믿기 어렵다. 승기는 아무 말이 없다. 둘은 분명히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 승기의 초음파 레이더는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순한 미어캣 김승기라니. 어쩔 수 없다. 승기의 일을 대신에 해야 한다.
“우현아, 정말 듣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네. 블루 고스트? 아버님이 거기 아시아 헤드라고? 아버님이 그렇게 사업을 크게 하고 있었어? 전혀 몰랐네. 하긴, 너도 얼마 전에 아버님과 다시 만났지? 그런데 진짜 믿기 어렵다. 오해는 말고, 의심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네가 한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면.... 그러니까, 블루 고스트에서 하는 일이라는 게.... 모든 국가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통적인 ‘에러’를 파악한다는 거지? 그 ‘에러’를 이용해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게 사업전략이고? 그리고 대표적인 ‘에러’ 중 하나가 부동산 버블이고, 그 버블이 곧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내가 이해한 게 맞아? 그런데, 네가 말하는, 아니 아버님이 말하는.... 버블을 어떻게 이용한다는 거야? ”
13. 우현이가 또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숙제 검사를 마친 선생님의 흐뭇한 표정이다. 아무래도 내가 이해를 잘했나 보다. 그런데 버블을 어떻게 이용한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 요즘 대한민국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서울에서 다른 이의 집에 전세로 더부살이하는 자는 매일 눈뜨기가 겁이 난다. 요즘처럼 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면, 전셋값도 더불어 상승하기에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누군가는 말한다. 서울에 살면서 엄살 좀 그만 부리라고. 정말 억울하다. 나나 승기는 서울에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다. 정말이다. 서울에서 생활한 지도 꽤 되었다. 하지만 옆집에 누가 사는지 여전히 모른다. 말이야 관계의 덧없음을 비판하며 탁자에 놓인 스투키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물론, 탁자에 놓인 스투키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울은 낯설고 여전히 무섭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니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사람들은 이런 무서운 곳이 뭐가 그리 좋다고 몰려들까? 결국, 우현이 말처럼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휩쓸리는 걸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얻는 것은 그저 빈손에 흥건하게 묻은 후회의 땀뿐일까?
아침엔 우유 한잔
점심엔 Fast Food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소리
어깨를 늘어뜨린 학생들
This is the city life! [129]
신해철 님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to be continued...
[125] 심기 (心氣): 마음으로 느끼는 기분.
[126] 불문율 (不文律): 어떤 집단에서 암묵 중에 지키고 있는 약속.
[127] 기시감 (旣視感):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이미 경험하거나 본 것처럼 느껴지는 일.
[128] 과거에 봤던 것을 처음 보는 것으로 느끼거나 잘 알고 있는 곳인데도 처음 와보는 곳처럼 느끼는 현상
[129] 넥스트(N.E.X.T), 『도시인』,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