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서 독주까지(판 밖에서 본, 흐릿한 경계 에세이)

15화

by 송필경

판 밖에서 본, 흐릿한 경계


나는 끝내, 정해진 판 밖으로 밀려났다. 묵묵히 삶의 숨골을 따라 내려앉던 흑돌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격자무늬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치열하게 버텨왔던 모든 의미가 한순간 '딱'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무참히 무너졌다. 갇히고, 구겨지고, 결국 따내어지는 그 찰나의 충격은 온몸의 신경을 가차 없이 끊어내는 듯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패배와 소멸만이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내 이름, 내 존재는 이미 판 위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곳은 침묵만이 흐르는 칠흑 같은 심연이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툭' 하는 허무한 낙하 끝에, 비로소 시야가 거짓말처럼 탁 트였다. 숨 막히도록 나를 조여왔던 검은 선들의 질곡과 낯선 돌들의 위압감. 오직 승패에 매몰되어 보지 못했던 거대한 판 전체, 아니 그 너머의 광활한 우주가 눈앞에 아득히 펼쳐진 것이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애쓰며 지키려 했던 한 점의 공간이 얼마나 좁디좁았는지를. 내가 옳다 믿고 밟던 모든 길들이 사실은 스스로에게 그었던 견고한 한계선이었다는 것을. 저 거대한 심연의 끝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엿보는 순간이었다.

판 안에서는 옳고 그름이 절대적이었다. 잃는 것과 얻는 것의 경계는 너무도 선명했고, 그 선 하나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 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판 밖으로 나오자, 그 모든 선들은 단지 인간이 그어 놓은 허망한 흔적에 불과했다. 승패 자체가 무의미해진 자리에서 나는 혼란 속에 비로소 평화를 느꼈다. 과거의 잔인한 메아리도, 쇠사슬처럼 나를 묶었던 기억들도, 이 드넓은 시야 안에서는 그저 작고 희미한 얼룩으로 보일 뿐이었다. 상처와 치유의 경계마저 흐려지는 모호함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나의 균열 속에 숨겨진 새로운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상처 입은 존재이며, 한때 판 밖으로 밀려난 미미한 흑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승패라는 낡은 규칙에 갇히지 않는다. 내 그림자 속에 숨었던 모든 질문과 답들이 새로운 의미를 찾아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기나긴 어둠을 뚫고 새벽이 오듯, 삶을 짓누르던 모든 경계가 빛 속으로 부드럽게 녹아내릴 것을 알기에. 나는 이제 기꺼이, 그 경계가 사라지는 모호하고도 아름다운 지대,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연주의 무대로 첫 발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다. 과거의 아픔이 영롱한 음표가 되어, 비로소 새로운 멜로디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