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옆 여백에
보이지 않는 질문들이 쌓이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언젠가 시험 밖으로 넘어갈 것이다.
K는 그 ‘언젠가’를
조금 앞당겨 보기로 했다.
도서관 게시판에 짧은 글을 올렸다.
“이 문제는 정답이 하나로 고정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K는 근거도 함께 적었다.
법령 해석의 여지,
판례의 변동 가능성,
출제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논리.
공격은 아니었다.
다만 가능성을 말했을 뿐이었다.
댓글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괜히 머리 복잡하게 하지 마세요.”
“틀렸으면 인정하면 되죠.”
“시험은 원래 그런 겁니다.”
어떤 이는 더 짧게 남겼다.
“핑계.”
K는 다시 정리해 올렸다.
“정답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답이 ‘하나만 가능하다’는 전제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그 글에는 추천보다 신고가 먼저 달렸다.
며칠 뒤 게시글은 삭제되었다.
사유는 간단했다.
‘수험생 혼란 조장.’
K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혼란은 K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미 문제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K는 그걸 말했을 뿐이었다.
스터디 모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K는 문제 하나를 꺼냈다.
“이건 출제자의 해석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하는 답 아닙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는 노트를 넘겼고,
누군가는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시험은 그 답을 원하잖아요.”
그 말은 반박이 아니라 결론이었다.
그날 이후 K는 모임에서 덜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질문은 토론을 만들지 않았다.
질문은 분위기를 깨는 행위가 되었다.
K는 시험 밖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교육 관련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공정성은 과정의 동일함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조회 수는 빠르게 올랐다.
댓글은 짧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제도 탓하기 전에 노력하세요.”
“불합격자 마인드.”
그 단어는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사건 기사 아래 달렸던 댓글과 닮아 있었다.
‘가정사 문제.’
‘개인적 비극.’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설명은 언제나 간단했다.
간단할수록 많은 것이 지워졌다.
K는 그날의 기록을 떠올렸다.
CCTV,
통화 내역,
정리된 기사 문장.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어 있었다.
다른 가능성은 처음부터 문서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험도 비슷했다.
정답은 이미 정리된 이야기였다.
다른 해석은 오답 처리되었다.
K는 멈추지 않았다.
작은 블로그를 만들고,
판례 비교 자료를 정리하고,
출제 경향의 변화를 수치로 묶었다.
감정이 아니라 근거로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질문은 늘 같았다.
“그래서 합격은 했어요?”
그 질문 앞에서 K의 말은 힘을 잃었다.
결과가 없는 사람의 문제 제기는 투정으로 분류되었다.
정답은 여전히 중립처럼 불렸다.
어느 날
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익명이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정답을 바꾸지 않습니다.”
K는 그 문장을 오래 읽었다.
S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늘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K는 처음으로
자신이 틀린 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질문이 아니라
집착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문제를 다시 펼치면 여전히 보였다.
문장은 단정했고, 가능성은 삭제되어 있었다.
정답은 중립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누군가의 선택.
K는 아직 그 선택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집 안에서 사라진 이야기처럼,
기록은 이미 정리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K는
그 기록을 다시 읽으려는 사람일 뿐이다.
오늘도
K의 글 하나가 조용히 삭제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K는 안다.
소수의 의견이 틀렸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겨두면 불편해지기 때문에 지워진다는 것을.
시험은 정답을 고르는 사람을 남긴다.
사회는 결과를 가진 사람의 말을 남긴다.
K는 아직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질문을 멈추지는 않기로 했다.
정답이 하나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6부|출제자의 자리
정답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삭제되는 문장들,
남겨지는 해석.
나는 처음으로
시험 내부에 닿을 단서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