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시듦으로
비로소 제 이름을 드러낸다.
피어날 때의 나는
그저 붉은 덩어리, 노란 덩어리였을 뿐
형체 없는 빛깔의 아우성.
지는 오후,
붉은 노을빛에 깊이 물든 시든 한 송이,
끝까지 남아 시간의 자리를 굳게 증명한다.
대지를 뚫던 초록잎의 날 선 움직임,
메마른 순간에 나를 적시던 촉촉한 숨결,
작은 봉오리가 내게 기댔던 순정한 그날 —
오직 시듦만이 간직한 기억들.
그렇게
그대와 나의 자욱한 시간을 둔 채,
나는 홀로 길을 걷는다.
빛으로 진다는 것은
끝나지 않음이 아니라,
모든 흔적이
조용히 내 안에서 빛난다는 것.
그대에게 나는 어떤 흔적이었을까.
나는, 기꺼이 황홀했던 적 있다.
삶은 결국 시듦을 통해 이름을 얻는다.
사람과 시간, 순간들은 피어나기만 할 때보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를 드러낸다.
나는 지금, 과거의 그 찰나를 떠올린다.
그때의 설렘, 그때의 온기,
그리고 그때의 작은 나와 당신이 남긴 흔적.
그 흔적은 이미 지나갔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꽃잎처럼, 시든 자리에도
빛과 기억은 남아 내 안에서 숨 쉰다.
홀로 걷는 길 위에서
나는 안다.
과거와 마주하며 흘려보낸 시간마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때처럼 기꺼이 황홀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조용히 마음 깊이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