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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D Nov 08. 2021

가을을 보내주며

 11월 8일 오늘은 입동 다음날이다. 가을을 아주 보내려고 작정을 했구나 싶을 정도로 비랑 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이건 절대 겨울의 소행이야. 바람결이 예사롭지 않은 게 딱 보니 한치도 봐주지 않고 잎을 모조리 떨어트리겠다는 그 굳은 의지가 다 드러나는 듯했다. 입동이라는 딱지를 가지고 가을이라는 방에 쳐들어와 온 나무를 가차 없이 앙상한 뼈만 남기고 벗겨버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따져 묻고 싶을 정도로 빗방울은 딱딱 소리를 내며 무정하게 낙엽들을 떨어트렸다. 소리 때문인지 마치 간당이던 게 딱밤을 맞고 맥없이 떨어져 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걸 지켜보는 내가 다 서러워서 빗방울들에게 겨우 어제 입동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 정도까지 매정하게 해야 해? 라고 한 마디씩 톡 쏘아주고 싶었다. 빗방울은 꼭 이렇게 해야 한다며, 입동이라며 내 눈앞에서 겨울의 출현을 실감시켜주었다. 또 몇 주 전처럼 갑자기 나한테서 가을을 뺏어가는구나 하며 원망했다. 잎들은 빗방울에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한 톨도 남김없이 앙상한 가지밖에 남지 않은 나무들이 눈에 보였다. 후두두둑 잎들이 내 시야를 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말 겨울이구나. 가을은 더 이상 없어. 이제부터 겨울이야. 이것만큼 확실한 선전포고가 또 있을까. 조금은 더 붙어있을 수도 있었는데 그것마저 다 떼 버리고 말이야. 그것도 비랑 바람이랑 합세해서! 너는 아마 참 무서운 겨울이 될거야..




 나에게 겨울이란 어떤 의미인가, 추위에 맞서기 위해 차곡차곡 싸맨 이들이 귀여워서 좋고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좋고 가족과 내 생일이 있어서 좋은 계절이다. 내가 챙길 사람들 중엔 연말에 생일인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연초부터 달마다 꼭 최소 한 명은 생일을 챙겨주면서 한 달 한 달씩 지나감을 바쁘게 체감하다가 내 생일이 가까워지는 11월이 되면 맘 편히 쉬어가는 템포가 된다. 이맘때쯤 되면 올해 생일은 또 어떤 날씨일까 궁금해진다. 11월은 춥긴 한데 날씨랑 눈치싸움을 해야 하는 추위라서. 차가운 바람이 체감온도를 낮추어 덜덜 떨리게 하는 날씨일까, 아님 따뜻한 햇살 덕에 포근한 기운으로 시원한 공기에 코끝만 적시는 날씨일까.

 작년은 어땠더라.. 그땐 한강에 갔었는데 시린 바람에 눈코 뜰 새 없이 도망치듯 실내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만 해도 이쯤이면 한파주의보도 내려서 수능 땐 수험생들이 롱 패딩을 입고 입실하던 모습을 봤었는데, 요즘은 그맘때쯤 되어도 아직 그때만큼의 추위는 아닌가 싶다.



 벌써 몇 주 전인가, 갑자기 한파주의보가 내렸던 날. 내색 안 했지만 이도 저도 못하고 사계절 중 무려 가을을 잃어버린 느낌에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맞아 이상하긴 했어 10월에 반팔을 입고 햇살을 맞으면 더위를 느낄 수 있었다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날씨였다. 푸른 잎들도 언제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무척이나 혼동스러웠겠지?

 특보가 내렸던 날 가을을 아직 만끽하지 못했노라고 아우성이던 많은 이들의 하소연들이 쏟아졌었다. 나도 아쉬웠지만 누굴 탓하리.. 가을 옷을 미리 사두지 않아 다행이었나. 약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내가 알던 가을 날씨가 돌아왔다. 막상 주의보가 닥쳤던 그때엔 원성이 자자했는데 지금 가을이 다시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은 하나도 못 본 것 같다. 영영 가버린 줄 알았던 게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싶은데, 그래 이게 원래 가을이지! 하는 생각들이었나?



 겨울엔 주머니 속에 숨긴 핫팩이나 맞잡은 손처럼 그런 조그만 온기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 봉투를 품에 안고 기관차처럼 입김을 뿜으며 달려가는 사람을 보면 누구에게 저 온기를 전하고 싶어서 저리도 급히 갈까? 하며 '누구'가 부러워진다. 추운 날씨 속에 오도도 각자의 온기를 높이고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는 게 좋다. 그래서 겨울이 좋다.

 겨울은 아침에 이불밖에 나오는 게 하루의 제일 큰 과업이 된다. 매일 대견하게도 그 과업을 실천하려는 나를 돕기 위해서 전기장판을 들이고 두꺼운 극세사 잠옷을 꺼내 입는다. 눈을 뜨면 밤새 추위에 떨었을 코 끝을 손아귀에 넣고 달구어준다. 창 밖으로 들어오는 뾰족한 햇살을 맞으며 겨울 아침 공기를 크게 한모금 마시면 꼭 아주 도수 높은 술을 들이켠 것처럼 속이 뻥 뚫려서 공기가 어디쯤을 지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쾌하다. 차가운 겨울 아침 공기가 좋아서, 그래서 겨울이 좋다.




앞으로 7번의 일요일을 보내고 나면 내년이 된다. 한 해의 고지를 코 앞에 두고 보자니 벌써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진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히려 끝이 보이니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지는 이상한 마음이 든다. 그러엄 마무리는 잘해야지. 평소에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미 지나왔으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할 마음 드는 게 어디야 하고 생각해본다. 잘 마무리하고 싶어서 10월보다 11월을 더 열심히 뜨개질하듯 한 땀 한 땀 계획했다.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의 내가 잘 해내어주길 바라며, 오늘은 가을을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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