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림자가 내게 말했다.
여느 때처럼 너는 더벅더벅 찰박찰박 살금살금 엉금엉금 성큼성큼 어디로든 가겠지
어디로 가든 좋아 묻지 않을게 단지 네 발 밑에 있게만 해줘
해가 지고 나면 넌 나를 찾지 못할 테니 성가신 일은 아닐 거야
해가 지면 난 사라질 거거든.
내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있어야만 내가 존재할 수 있는데, 해가 없으면 난 존재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네게서 멀어져 해를 따라가야 할까?
그렇지만 나 혼자선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다가가면 나는 또다시 없어질 텐데.
내가 없어지고 나면 넌 나를 찾을까? 찾는다면 어떤 이유로.
나는 아무런 용도가 없는 걸 나도 내가 왜 있는지 몰라.
사실 나도 그래. 내가 어떤 용도인지 몰라서 매일 같은 고민을 해. 그림자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꼭 용도나 역할이 있어야 할까? 싶다가도 내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결국 나의 용도를 지어내려고 하더라.
그림자야 너의 용도는 이래. 아무 대가 없이도 내 존재를 확인시켜줄 수 있고 함께해줄 수 있는 것. 아무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 발 반대편 아래서 발을 맞대고 있는 친구가 항상 있다는 건 정말 큰 위로야. 난 언제나 너의 존재를 느껴. 아무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음을
P.S. 다시 보니 넌 사랑과도 꽤 닮아있구나
MINED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