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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D Dec 07. 2021

단상집 <1>

관계, 그리고 공간

점점 어그러지는 관계가 있어요. 서로 불편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꾸 부대끼다 보면 나아질 줄 알고 부빗대던 관계가 있었어요. 지금에서야 돌아보며 느끼는 거지만 지금 멀어진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 당시에도 나와 꽤나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걸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이 일이 끝나면 왠지 볼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사람. 또는 빠득빠득 서로 반대방향으로 맞대고 버티던 관계도 있었어요. 애증도 사랑이라면 사랑일 수 있는 관계더라고요. 딱 그런 관계였죠. 결과적으론 모두 멀어져 버렸어요. 싫어하는 것도 공들여야 하는 일이더라고요. 나름의 정성이랄까요. 점점 뭔가 본능적으로 결이 다른 사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내가 평소처럼 내뱉은 말 한마디가 그 사람에겐 나무판자의 반대 결로 손을 쓸어내려버린 것처럼 꼭 이상하게 가시 돋쳐 박힐 때가 있거든요.


얼마 전에 내 공간을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다들 잠들어 있는 집을 뛰쳐나와 새벽 탈출을 감행했어요. 잠옷바람으로. 이건 너무 과한가요? 근데 너무 맘에 드는 잠옷이라 아무도 없는 새벽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어요. 두 시 반인 데도 생각보다 거닐어 다니는 사람이 많네요. 24시간을 하던 집 앞 편의점에 불이 꺼져있어요. 웬일인가 싶어요. 늘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불 꺼진 걸 보니 다소 생소하네요. 무슨 연유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자주 가진 않았지만 늘 있던 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낯선 건 참 잘 알아채는 것 같아요. 꼭 둥근돌 사이에 모난 돌을 골라내는 것처럼요. 참 다른 걸 잘 찾아요.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이런 게 나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 자꾸 다른 점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요. 아니 그걸 의도한 다기보단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런 곳으로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죠.

내 공간을 침해받지 않는 건 너무도 중요해요. 그걸 얼마 전에 깨닫곤 내 방을 정돈하기 시작했어요. 더 맘에 들도록. 머물고 싶은 아늑한 공간이 되도록 말이에요. 침구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조명을 사고 가구와 소품을 정리하고 배치해봤어요.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그림 포스터로 벽을 도배하고 나니 이제야 맘에 쏙 들어요. 계속 있고 싶은 나만의 방이 됐어요. 마지막으로 노래가 가장 중요해요. 내가 요즘 자주 듣는 선우정아 님의 serenade 앨범이 좋겠어요.

내가 느끼는 나만의 공간, space는 단순히 물리적 개념을 떠나서 어떤 보호 장막 같은 거예요. 얼마 전엔 처음 가보는 동네에 카페를 갔어요. 근처를 배회하다가 결국 최선책으로 고른 카페였는데 말 그대로 완전히 실패였어요. 앞뒤로 왁자지껄한 테이블들의 잡다하고 소란스러운 얘기가 고스란히 귓속으로 밀려들어왔거든요. 제 의지는 물론 0이었죠. 귀는 맘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기관이 아니어서 안타까운 순간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상상을 하게 되네요 귀라는 부분이 본능에 따라 근육 기관이 작용하는 기관이었다면 맘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좋기도 하겠지만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 나도 모르게 귀를 닫게 되어 난처한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단 그런 웃긴 상상이요. 부장님의 아재 개그 앞에 눈과 입은 웃고 있지만 귀가 사르르 접히며 귓구멍을 막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난처하기 짝이 없어요.

아무튼 재밌지도 영양가 있지도 않은 가십거리들을 박히는 대로 듣다 보니 도저히 집중이 안되었어요. 그 공간을 의도대로 잘 사용하는 그들이 문제라고 탓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방해받게 된 내 처지도 이해가 되려나요. 그건 내게 백색소음을 넘어선 재난 소음 수준으로 느껴졌거든요. 하려던 게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아 그냥 음료를 와르르 목구멍에 부어 넣곤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어요. 오늘 카페 여정은 실패했군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에요.

소리라는 게 생각보다 공간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나 봐요. 나는 내 공간을 곧잘 만들곤 해요.  소리만 컨트롤된다면 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에요. 그래서 이어폰이 너무 좋아요. 이어폰만 끼면 아무리 작은 면적이 나에게 허락되더라도 심지어 내 몸 하나 뉘일 자리밖에 없어도 온전히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내 공간을 하나는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게 생각보다 큰 심리적 안정을 주더라고요. 이어폰을 끼기 전에는 몰랐어요. 주변 소리를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내 space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요.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느낄까요. 그래서 이어폰을 그렇게들  달고 사나 싶어요. 무선 이어폰이 몇십 만원씩 해도 자꾸 사는 이유가 멋 때문만은 아닌 게 바로 이거일 거예요.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행복에 관심이 없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불행에 관심이 많은 듯해요. 내 행복은 그저 지나가는 길가에 즐비한 간판처럼 그들이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 배경에 불과해요. 내 불행은 길가에 파는 닭꼬치 같아요. 길 가다 이끌린 냄새에 고개를 돌려보면 이끌리듯 사 먹게 돼요. 그다음 몇 걸음 걷다가 금세 앙상해진 가지는 근처 쓰레기통에 휙 버려지고 말죠. 버리고 나면 맛있게 먹은 입 주변을 훔치고 끈적한 손과 함께 다신 돌아보지 않아요. 쉽게 입에 오르내리고 가십거리로 쓰인 다음 쓰레기통에 구겨 버린 휴지조각처럼 너덜너덜해져서 보잘것 없어지면 살펴주는 이조차 없죠. 이걸 느끼고 나니 얼마나 왜곡되든 잠깐 술안주가 되고 나면 끝인 그런 불행 소재의 주인공이 되기 싫었어요. 내 행복을 알아 달라고 아우성 치진 않아요. 그렇지만 내 불행이 이렇게 쉬이 소모될 가십거리로 쓰인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 나부터 변하기로 했어요. 간판은 꼼꼼히 읽어보고 더 이상 닭꼬치로 일회성으로 잠깐 배를 채우지 않고 양질의 음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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