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른 메타포를 가지고 있기에
작사가 조동희의 책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에서, 작가는 ‘당신의 노랫말의 배경이 듣는 이에게 들려지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해석을 하게 하기를 원하느냐’는 말에 대해 “후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의 명곡인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만 해도, 벌써 누군가에게는 그 자신만의 사연이 입혀지고, 그리하여 그의 삶에 맞는 OST가 되었기 때문이란 거다. 작가의 ‘열린 결말’에 대한 짙은 지향 때문이었을까. 이 책 또한 내겐 챕터마다 내 이야기를 끼워 넣게 되는, 그래서 어느새 작가의 메시지가 나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일이 벌어져 버렸다. 그것이 우리의 투명하고, 작고, 완전한 우주인 최소 우주를 만드는 걸로 유도되는 느낌이었달까.
- 책에서 소개된 피터 다우게의 <Milky way>. 에곤 실레를 좋아한다는 작가에게 누군가 이 그림을 추천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아직 에곤 실레와의 접점을 찾지 못하겠는데, 그것은 단지 작품세계나 시각적 패턴만을 들고 한 추천이 아니었겠다 싶다. 작가의 곁을 지키며 그 작가의 취향을 알기에 추천한 그림이었겠지. 나는 작가의 이야기와 취향이 조금 더 궁금해져서, 책에 언급된 올라브 H. 하우게의 시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도 주문했다. 역자가 내가 몹시 좋아하는 학부시절 교수님이셔서 너무나 놀랐다.
스스로, 자기의 언어로 표현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쉬워 보이지만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책에선 ‘메타포’를 둘러싼 이야기를 뒤편 대담에서 잇는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 대사에 “선생님 온 세상이 무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라고 나오는 것을 정현우 작가가 물으며 시작된 주제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오브제를 이야기한다. 유리, 빛 같은. 이 책의 특징 덕에 나는 이들의 대화에까지 스스로 끼어들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현상을 볼 때 어떤 면을 떠올리는가, 가령 편의점을 지나며 포켓몬을 먼저 떠올리는지, 아니면 인권이나 마케팅, B급 정서 콘텐츠를 떠올리는지. 그리고 그 현상 자체를 어떻게든 해석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 같은 것이 녹아있는 건 아닌지. 오브제에 대해선 또 어떠한가. 책에선 ‘풀린 운동화 끈’ 같은 것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거기에서 받는 감흥보다 되려 아이패드에 딸린 고급 키보드의 감촉, 인위적인데 계속 맡고 싶은 진한 향내를 풍기는 향초, 이불인데 정전기가 일지 않으면서 보송하게 코팅 처리된 솜이불 같이 참 비유도 길고 설명도 많은 것들에 관심이 많다. 시인이 되기엔 틀린 모양이지만, 그래도 산문가로서는 나쁘지 않은 것 아닐까.
소재로서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넷플릭스 시리즈인 <조용한 희망 (원제 Maid)>에서는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모여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글로 쓰는 연습을 한다.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어도 좋고, 일어난 적 없어도 생각만 해도 좋은 순간이어도 된다. 여성들은 아버지와 함께 봤던 밤하늘, 친구들과 놀러 갔던 클럽, 아이가 태어난 순간, 새로이 나아가는 앞날 같은 것을 쓰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그걸 들은 다른 이들이 그 글에서 기억에 남는 감각적 표현들을 하나씩 리마인드 한다. 큰 곰자리와 작은 곰자리, 작은 손 같은 표현들이다. 그렇게 쓰고 나누고 남의 말을 통해 다시 들려오는 나의 이야기는, 어떤 명민한 자의 팩트체크나 까다로운 맞춤법 논의, 까탈스러운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이야기를 한 공간에 흘려보내 그것이 바다를 타고 다시 나에게 돌아왔을 뿐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술자리에서 밥자리에서 가볍게 조잘대던, 하지만 사실 그 속엔 내가 있어, 라는 의미를 담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그리고 가끔씩 내보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