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능력

나만의 결로 밀고 가는, 모험을 할 수 있는 시대

by 제인봇

학점은 3점 대 후반. 국내 명문 대학에서 인문학 전공. 인기있는 타 전공을 복수전공으로 삼고 싶었지만, 예상치 못한 경쟁률에 실패. 돈 많이 버는 일과 이름을 남기는 일, 안정적인 일 중 어떤 것을 일상으로 삼고 싶느냐는 물음에 돈 많이 버는 일과 안정적인 일을 고른 스물 몇 살 학생이 내 앞에 앉아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그 친구는 꽤 적극적으로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나름의 진로 컨설팅을 받고 있었는데, 그 탐구 대상 중 하나로 나도 포함됐다.


내가 데이터를 공부하겠다고 선언하고, 기존의 커리어를 뒤로한 채 나온 것이 어언 6년 전이다. 2015년이면 사실 빅데이터라는 말이 수면 위로 막 올라온 상태였고, 해외발 '데이터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선진 문물로 인식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나고 자라며 기른 것은 호기심인지라, 다소간의 메이커(maker) 기질에 하필 불이 활활 붙는 바람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문과 출신의, 코딩을 어릴 때 쬐금 배운, 학점도 영어 성적도 그닥 좋지 않은, 저널리스트 출신 스팩의 사람. 6년이 흐른 지금은 딥러닝 코드를 짜서 사람들이 만들어 흩뿌려 둔 데이터의 속내를 파헤치는 연구자가 되었다. 일종의 커리어 체인지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나이, 서른 살.


나와 배경이 너무도 비슷한 이 친구에게, 나는 "인문대 출신으로 데이터 사이언스나 딥러닝 분석 쪽에 오면 진로가 생각보다 순탄치는 않다"고 말해주었다. 나 또한 석사를 마치고 구직 시장에 나간 기억이 있었고, 결국 어렵사리 어느 연구원에 자리 잡기는 했지만, 학술적 성격이 짙은 곳이라 곧장 박사과정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개발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학부 배경이 다르니 대기업 개발자 자리는 순순히 얻기 힘들고, 분석을 아주 잘 한다고 해도, 통계학과나 수학과에 밀리는 일도 부지기수. 학계에 와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신나게 뭔가 만들어보고 해석해보자고 했지만, 그러기엔 박사과정 이후의 삶만큼 불안정한 것도 없으리란 생각도 들어 이내 말을 접었다. 이런! 세상은 정말 각박하구나! 적어도 너희 시대엔 딥러닝이니 데이터사이언스니 하는 것이 필수 교양이 되었으니 인강이라도 좀 들어두렴, 이라는 정도로 마무리를 지을 수 밖에.


그런 와중에, 얼마 전 대화형 SNS인 클럽하우스에서는 영 모르는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 나에게 이러이러한 진귀하고 신박한 능력(데이터 분석)이 있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이런 케파에 대한 니즈가 있느냐.

상대방: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뭐 엄청 힘들고 위기인 것은 아니다.

세상은 "개혁과 혁신을 위해선 그 능력이 필요해! 적극적으로 반영하라구!"라고 외치지만, 막상 실무에서는 "사람이 하는 게 낫고, 사람이 해도 되는 일이라 딱히"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그 니즈가 필요한 곳을 찾아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들과 딥러닝 개발자들이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니즈를 어떻게든 만들어서 그곳에서 새로운 업무 형태를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어려운 시대라고 프레이밍이 돼선지, 세상은 '필수인력'이라는 말로 출근할 자와 집에서 일할 자를 구분한다. 물론 여기에는 '필수로 오프라인 근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긴 말이 함축돼 있지만, 유행처럼 번진 '몇 글자로 줄여 말하기' 덕에 사람들은 종종 오해를 하고, 개념을 굳혀 버린다. 니즈가 필요한 곳을 찾아 가는 것이 가성비가 높고, 니즈를 만들어 새 롤(role)을 개척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어렵다. 집에 그럴듯한 미술품이 걸려있는 것은 좋지만, 사실 벽이 비어있어도 문제는 없다. 지난 6년 간의 빅데이터 대유행을 지나면서, 어떤 곳에서는 데이터 분석 같은 일이 사치스런 가욋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 이런. 하지만 나는 그렇게 이걸 가욋일처럼 여기는 그 곳이 진짜 니치(niche)라고 생각하는 걸!


커피 전문가인 어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판매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커피를 판매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2대 8, 많을 때는 1대 9까지도 양보를 한다고 했다. 대중의 입맛을 바꾸려는 혁신적인 기획은 사실, 짬이 날 때 할 수도 있다는 것.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커피는 스타일이 명확하고, 그 스타일을 잘 타깃팅하면 자본을 증식할 수 있으니, 자신의 꿈은 그 여윳돈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면 되는 것이란 이야기였다. 귀가 얇은 나는 그 말이 새삼 진리로 들렸고, 내가 겪어보지 않은 현실세계인지라 감히 반항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f(x) 공식인데, 나는 왜 f'(x) 아니, '공식없음'을 원하는 것일까,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일까.


다만, 세상은 돌고 도는 법. 위에서도 언급했듯, 내 결이 오롯이 드러나는 미술작품은 언젠가는 운좋게 남의 눈에 띄는 법. 타인의 니즈는 충족하면서, 내 색채는 쌓아가는 능력이, 이제는 정말 중요해진 순간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타인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삶, AI가 대신할 수 없는 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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