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생활기 #21] 이제는 멀어질 준비를 해야겠다
변호사시험이 아닌 다른 걸 합격했다. 따로 준비하는 걸 부모님께 말씀 안 드렸었는데, 합격발표가 나고 나서 말씀드렸다. 나는 내가 그동안 애써온 걸 알아줄거고, 나를 더 인정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과 행동은 정말 서운했다.
1. 엄마가 나에게 유세를 부린다
엄마가 내 합격소식에 기뻐하다가, 본인이 나를 잘 키워서 내가 잘 됐다고 말씀하신다. 본인이 자식은 잘 될거라서 내가 잘된 거라고 하신다. 그동안 말도 안하고 혼자 애써오면서 준비한 건 난데, 어떻게 다짜고짜 본인의 합격과 영광인 것처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다. 이런 나를 키워냈으니 아빠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체면이 선다고 말하는데, 은근히 화가 난다.
엄마는 한 게 없다. 엄마는 친구들과 놀러다니면서 편안한 삶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공부한다고 엄마에게 신경이 쓰일까 말하지 않았고, 엄마는 가끔 만날 때마다 결혼과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평범한 한국엄마처럼 강요하며 스트레스 주고, 사소한 물건 하나도 대신 주문해달라며 귀찮게 했다. 나는 엄마에게 경제적인 지원도 받지 않았고, 그렇다고 엄마가 나에게 정성스러운 밥상을 차려준 적도 없다. 손님이 온다고 하면 나를 먼저 불러다가 같이 준비를 시킨 적은 있다. 나에게는 이 합격의 과정에서 역경 같았던 엄마인데, 내가 애써온 지난 날을 알아주기도 전에 본인의 덕분이라는 말이 어떻게 먼저 나올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2. 가성비 좋은 자식이라니
엄마가 내가 말 없이 준비하고 합격해서 정말 가성비가 좋은 자식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식이 있어서 좋으니 나도 자식이 있어봐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이 결과는 그냥 횡재가 아니다. 나는 피가 마르는 고통을 참는 지난 날이 있었는데, 그 결과만 들은 엄마라면 지난 날 도와줄 것은 없었는지 앞으로 도와줄 것은 없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데 엄마한테는 그 시간이 값싼 무언가였나보다. 하다못해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도 가성비 좋게 이겼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이제 자식도 만들어 더 남부럽지 않은 자식이 되라고 요구하고, 변호사시험 2달을 남기고 내가 듣기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자식이 있어야된다는 말을 해서 내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나는 과정 중에는 엄마를 배려했고 좋은 결과를 전달해줬는데, 돌아오는 건 더 큰 요구와 더 배려없는 행동이다. 나는 이제 엄마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 두렵다. 엄마가 이런 자식이 있어서 좋다는 건 내게 모욕이 아닌가. 자식이라고 부모에게 맞추는게 당연한게 아니다. 나처럼 참아주는 호구가 옆에 있으면 누구라도 좋다. 자식이라서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좋다는 건가. 그렇다면 자식을 둔 의미가 아니라, 자식을 이용하는 재미겠지. 이런 취급을 하려고 나를 낳았나. 자식을 존중하고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는 삶이어야 자식을 둔 의미라고 할만하지 않을까.
3. 나를 자랑거리 삼고자 내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
엄마가 저렇게 결혼과 아이 강요를 하는데는 그 나이대 사람들은 그게 인생의 정도와 행복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 같아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합격 소식을 전달하면서 나의 능력을 입증한 와중에, 변호사시험이 2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굳이 저 말을 해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엄마의 저 강요에 나의 행복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저 흠결 없는 자랑거리를 얻고 싶은 그 욕심에, 결혼하면 돈을 보태주겠다 뭘 해주겠다도 아니고, 인생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사이비 종교 같은 무의미한 말로 내게 강요를 해온 것이다.
엄마가 결혼을 해서 좋고 의미 있었다는 말을 내게 하는 건 기만이다. 엄마의 결혼생활을 가장 잘 아는 게 누군데, 아빠와 갈등의 순간마다 감정쓰레기통이 되어줬던게 누군데, 결혼을 해야 좋다는 말은 너무 양심이 없다. 자식이 있어 좋다는 말은 우선 나는 좋은 조건과 경력을 가지고 있어 자아의탁하기 좋다는 말일 것이고, 그런 내가 엄마를 위해주고 배려해주니 더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 나의 조건과 경력은 남을 의탁할 필요도 없이 나의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엄마가 이용해서 본인에게 맞추도록 한 과정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엄마에게 '너가 나를 이해해주니 좋다', '너 밖에 없다' 이런 말을 들어왔는데, 이제는 그 말도, 혼인적령기가 된 김에 뒤에 붙은 '그래서 너도 자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도 정말 듣기가 싫다.
나는 엄마가 자랑스럽지 않다. 애초에 엄마를 두고 자랑거리여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냥 그 자체로 내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순수했나보다. 한국엄마들에게 그 친구라는게 뭔지. 거기에 자랑하고 싶어서 내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게 정말 충격적이다. 이번 합격소식을 전달하면서 나는 그저 자랑거리였을 뿐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았다. 엄마의 마음이라는 것도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엄마와 좋은 기억도 많다. 그런데 이제 엄마의 마음은 투자금을 찾고 싶은 투자자의 마음으로 바뀌어 엄마의 만족과 나의 행복이 반대에 놓여있다. 나 이번 변호사시험만 끝나면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이제 엄마의 자존감을 채워주는 말 잘 듣는 자랑거리가 되는 건 그만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