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최인훈)
어린 시절, 내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바라보며 세상에 외로움과 소외감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 책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런 과정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겪었던 일이라는 걸 알지만, 당시에는 책 속에서 나와 같은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대상을 만나는 것이 많이도 소중했다. 어린 제재, 모모, 캔디, 앤 셜리, 안네 프랑크, 제롬, 데미안 등. 때로는 몸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사람들보다, 책 속의 그들이 정서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광장’에 참여하지 않고, ‘밀실’을 살았던 걸까?
광장은 사회적 삶의 공간을 상징하고 밀실은 개인적 삶의 공간을 상징한다고 한다. 물론 마음이 극히 힘들 때는 혼자 마음의 굴을 파고 들어가게 되지만, 살만해진 사람들은 누구나 ‘광장’을 원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상식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매사에 관념적이고 거리를 두며 냉소적인 이명준은, 유난히 ‘정치’ 영역에, 많은 비판과 독설을 할애한다. 아마도 그가 가장 관심을 갖고 원하는 영역, 개입하거나 관여하고 싶은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말미에도 실은 아버지 일로 인해 정치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경멸을 보인 것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원하고 소망하는 바가 너무 크거나 간절해지면, 사람은 짐짓 딴청을 피우거나 혹은 기회가 찾아와도 덥석 받지 못하는 법이다. 행여 그 소중한 것을 만나고도 잃거나 거절당할까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그의 의지나 선택과는 아무 상관없이, 남한에서의 정치에 처음부터 배제된 존재였으니, 수많은 관념으로 자신을 중무장한, 지적인 냉소주의자가 될 밖에.
그렇게 인생을 풍문 듣듯 슬프게 살 것 같았던 그에게, 현장을 찾아 참여할 계기가 찾아온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으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그래도 철학을 통해 절박하게 붙들고 있던 가느다란 희망의 끈마저도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윤애와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일방적인 몸의 길에 취하게 된 것도, 그간 관념과 이상에 과도하게 몰두하던 자신에 대한 좌절과 허무였을지 모른다. 겁쟁이에 연약한 이명준도, 너무 당연하지만, 보람 있는 삶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 ‘광장’을 추구하던 사람이었던 거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간곡하고 절박하게 찾고 있었을 것이다.
남한에서 모든 걸 잃은 그는, 북한에서 그간 갖지 못했던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의 참여 기회를 얻으며, ‘광장’에서의 삶을 얻는 듯 보였으나, 역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개인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엄격함 속에, 개인의 흥과 열정은 발붙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서건 가장 좌절할 때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오게 되는, 혹은 찾게 되는 것이기에, 그 무렵 명준은 놀랍게도 싱싱한 ‘사람’, 은혜를 발견한다. 용기를 내어 광장에 참여한 이명준이 만난 ‘운명’이란, 완벽주의자인 그가 참을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구현될 때 필연처럼 뒤따르는 ‘실패’와 ‘불완전함’일까? 그럼에도 고통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사랑’일까? 대안 없이, 철저히 진 사람들의 사무치는 사랑이, 사실 그리 건강한 감정은 아닐 테지만, 좌절과 고통을 마비시키는 ‘밀실’이 되어주는 것은 틀림없다.
<광장>의 이명준이 스스로 선택했던 중립국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자살하게 된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절망이나 고통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슬프고 암담했던 남한에도,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환멸을 주는 대상이긴 하나, 친구, 애인이 있었고, 북한에서는, 기대했던 광장이 철저히 절망과 실패로 다가왔으나 그래서 더 소중하고 절실하게 찾은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 속에서, 성격까지도 골라잡을 수 있는 제3국의 언뜻 이상적이고 홀가분한 그 광장은 공허할 뿐이었다. 기쁨이나 만족뿐 아니라 환멸과 절망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존재하는 곳에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빈터’가 아닌 ‘광장’은, 상처와 짐이 될지언정, 사람과의 연결의 흔적들이 남아, 맥락을 이루는 곳에, 내가 서있는 그곳이기 때문이다.
어리고 미숙했던 나도 사람들에게 위안을 기대하는 것이, 위험스럽고 불안해 책 속의 인물들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소망은 그런 자폐적 위로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습작은커녕 그 흔한 일기도 쓰지 않으면서, 언젠가는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공상적 소망인지 망상인지가 잘 멈춰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내가 쓴 글이, 어딘가의 누군가와 나를 연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바람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나 보다. 그러니 나에게는 글쓰기가 내가 나서거나 이르고 싶은 ‘광장’일지도 모르겠다. 광장에서 패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 거기에 이르는 길에서 얼마나 깊게 보고 살피며, 열심히 사랑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이 아름답다. 풍문 듣듯 살지 않고, 현장을 찾아가 ‘운명’을 만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