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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실 Oct 03. 2022

예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다.

<달과 6펜스>를 읽고

    이 소설은 한 화가의 예술적 개성을 통해, 인간의 예측 불가능함과 불가해함을 드러낸 소설로 유명하다. 이때의 예술이란 어떤 수단이나 도구가 되지 않는 예술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인공인 스트릭랜드는 “나는 그려야 하오”라는 말로 이를 표현했다. 다른 것은 없었고 아주 간결한 말과, 과하다 싶을 만큼 단순한 행동과 실천을 통해 작가의 예술관이 표현되고 있다. 온전히 ‘자신’을 만나고 ‘자신’에 이르는 길, ‘자신’과 연결되는 자아실현의 길을 너무 분명하게 발견한 한 중년 남자가, 상당히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가는 이야기이다. 그는 매우 확신에 차 있고 절박하다.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그렇게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행운이겠다.       

      

     작가의 주장처럼, 전혀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까지 규정하지 않더라도, 인간을 단순하게 정의하긴 힘들다. 삶의 시작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은 주어진 삶에 충실하기 위해, 혹은 충실까지는 아니어도 살아내기 위해,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 애쓴다. 인간의 가치는 결코 한낱 통장 잔고로 설명될 수 없으며, 인간은 성장과 통합을 지향하는 욕구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짧고 유한하지만, 사실 아무 생각과 가치 부여 없이 살아내기엔 긴 세월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볼 때 풍족하고 안정된 삶의 방식에 깃든 소박한 아름다움이 흔들리게 되는 이유는, 잘 정돈된 삶의 방식이 주는 행복과 가치를 거스르는 거친 삶의 방식에 이끌리거나 모험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갑작스럽게 찾아오기 때문만이 아니다. 변화와 미지의 세계가 주는 흥분을 체험하고 싶어 사회적 가치를 내던지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으로 본다.      


     스트릭랜드도 그런 사람이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도 잔인하고 비열하게 비치는 그의 모습과는 달리, 자기 가치를 실현하고 싶어 하는 인간, 어쩌면 가장 인간다움을 추구한 사람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스트릭랜드만큼 확신을 갖고, 극단을 감수하며,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은 많지 않겠으나, 인간은 언제나 보다 향상하고 통합의 길로 나가고 싶어 하며,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삶은 늘 고통을 동반하지만, 지켜내고 싶은 ‘가치’를 발견한 인간이라면 기꺼이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지구 위의 어떤 다른 피조물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팽배한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이긴 하나, ‘의미 있는 삶’으로 구원된다.            


     작가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세속적 평가를 경멸하기까지 하는 스트릭랜드를 아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스트릭랜드는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그 섬의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에서 신비스러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간다면, 거기서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라고 한다. 스스로 유미주의자를 자처하며, 예술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기는 작가의 견해를 반영하듯,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 속물적 삶의 방식에서는 완전히 자유롭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라는 것, 자유로운 인간은 무엇일까? 특히 몸이 초점을 맞춘 세속과 인습의 가치에서 자유를 얻은 영혼이라면, 굳이 남의 감정을 도무지 고려할 줄 모르고, 상대방이 상처를 받으면 오히려 즐거워하는 모습일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이나 존재를 자신의 욕구에 따라 대상화하는 스트릭랜드의 모습 역시 인습과 세속에 속박된 자아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였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전반기 삶을 ‘사랑’이라는 구실로 저당 잡고 구속한 아내에 대한 분노와 반감 때문인지, 그는 사랑과 소통에 줄곧 냉소적인 모습이다. 심지어 성적 욕망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보이는 등 그는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며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그이기에, 스스로 허용하고 통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혐오스러운 욕구나 특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적 욕망이 더욱 이상화되며, 극단적으로 추구되는 것이겠다.         


     한편 작가는 매우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관찰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들을 자기만의 틀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래서 매우 피상적인 부분까지 밖에 보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다. 특히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지속적이고 끈질기나, 차갑고 이기적인 존재 혹은 스스로는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남성의 애정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로만 나타나고 있다. 알고 보니 여성에 대한 편견과 냉소는 이 작가의 매우 잘 알려진 특징으로, 여성을 성적 욕구의 대상 혹은 남성이 사랑을 줄 만한 대상과 아닌 대상, 자신을 수용해줄 모성애가 있는 존재 혹은 없는 존재의 기준에서만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이러한 편협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가의 맥락과 삶의 고통, 외로움도 상당했겠다. 그래서인지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서로 소통하지 않으며, 간혹 연결된다 해도 그들의 연결은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이다.      


     스트릭랜드 부부는 십칠 년의 부부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태도에만 평가와 판단을 하며 지낼 뿐 서로의 마음, 감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렇게 실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분노와 좌절, 고통에 대해 무심하고 담담하게 대응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인생과 대중을 소설의 기회와 소재로만 여기는 냉소주의자 작가,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매우 선망하고 애정 하는 자신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스트릭랜드의 아내는, 교양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사실 냉혹함 자체였다. 그녀들에게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중요했고, 다른 사람들과 진정 소통하려는 욕구나 시도는 없어 보였다. 가령 집을 나간 남편에게 다른 사람을 통해 그녀가 전한 말은,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 차라리 죽겠다, 애들이 물으면 뭐라고 하느냐?’ 등이다. 

      “당신, 무슨 일이야? 왜 그런 거야?”라는 말이 먼저 나오게 될 것 같은데, 그녀는 남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나 마음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남편은 그녀에게 삶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대상화되어 있을 뿐 한 인간으로서 흥미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내가 한 개인, 인간으로서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도구적 존재임을 알게 된다면, 나 역시 스트릭랜드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신의 욕구에 솔직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헌신과 노력을 다하는 삶이 전혀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한편 갑작스러운 남편의 가출에도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스트릭랜드의 아내는, 남편이 바람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처음으로 분노했다. 단순하고 순간적인 일탈이 아니라 뭔가 간절히 구하는 바가 있어 떠난 남편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 가족을 위한 도구로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선언이므로, 그녀는 그의 이기심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혹은 그를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속기와 타자를 배우고, 타인들의 관심과 동정심에 기대는 현실성을 신속히 발휘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 충실한 책임을 보여주는 그녀지만, 자신의 용기와 사업수완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 ‘세속적 평가’, 그것도 실재라기보다는 그녀 마음에 형성되어 있는 ‘알량한 기준’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에게 헌신하는 능력까지 갖춘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해지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흔한 불행을 가진 여자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그녀가 남편을 사랑하지 못한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세속적인 평가에서 오는 가치가 아닌, 자신 내부에서 들리는 욕구와 가치에 인생을 걸 수 있는 남편의 용기에, 부러움을 넘어선 미움까지도 느꼈을 지로 모른다.           

       여기 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스트로브 부인.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는 결코 사랑할 수 없고 심지어 업신여기고 경멸한다. 대신 자신에게 관심이 없거나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 남자에게 끌리고 마음을 뺏긴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그녀는,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대상으로서의 자기만을 가치 있다고 느끼고 규정했다. 때문에 그녀의 사랑이 자신을 버렸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을 받을 만한 대상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전혀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다. 소중하지 않은 자신이기에, 오히려 가장 못나 보이고, 스스로를 전혀 존중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 자신을 줘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과 자신을 더할 나위 없이 경멸하고 멸시하는, 스트릭랜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녀 스스로 자신에 대해 가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렇게 자신을 대하는 사람에게서 친근감과 편안함을, 끌림을 느꼈을 수도 있다. 결국 다시 또 자신을 엄청나게 상처 주고 버릴, 거절할 대상을 용케도 잘 찾아내는 것이다. 사랑받을 가치도 없고 버려져 마땅한 나는, 그렇게 나를 대하고, 결국 거절할 상대를 잘도 알아본다.               

      스트로브는 자신의 감정과 연결되지 못해 불행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욕구 및 정서와만 연결되어 불행하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는 전혀 돌보지 않는 스트로브의 타인에의 헌신은, 자신을 지키는 적절한 분노의 선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선을 넘어 그를 침해하고, 그는 남김없이 침해되고 이용되고 제물이 된다.

       반면, 스트릭랜드는 더없이 편안하고 전혀 불안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내면에 연결된 그는 자신에게 충실하고 성실한 평화를 이루었을까? 그는 꿈속에서 살며,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캔버스에 쏟아붓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로지 자기 내면으로만 파고들며 자기를 찾기 위한 열정을 소진하는데 몰두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성욕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어떤 의미에서는 편협한 기준에 갇힌 사람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죄악시하기 때문에, 수용되지 못한 욕망은 의식의 거부와는 달리 관능적인 눈빛과 외모로 표출된다. 스스로는 관능적인 일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하나,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그는 자신에게 매혹된 여자를 경멸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투사하는 미성숙한(편벽된) 사람이다.                     

       자신이 고유한 가치를 발견해 이를 추구하고 전념하고 있다는 이 중요한 사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배신감과 고통은 안중에 없다. 조금이라도 남들을 신경 쓰는 것은, 예술혼 없이 명성만을 갈구하는 속물적 행위라고 여기며, 자신의 작품으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을, 남에게 힘을 행사하는 행위로 여겨 꺼린다. 자신의 다양성도 통합하지 못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도 갖지 못했다고 평가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공감능력이 결여되고, 타인과 연결되는 법을 찾지 못한 결점이 많은 인간이기에, 예술적 자아실현에 그렇게 필사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주체는 언제나 인간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예술이다. 세상과 사람들에 화해하지 못하고 인간에 대한 분노로 자기 안으로 파고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스트릭랜드지만, 문명을 떠나 타히티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좀 더 편안하게 투사했다. 하긴 그도 그만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을 외면하고 인간을 버린 것처럼 보인 스트릭랜드지만, 자기 그림의 아름다움이 발견되길 바라고, 타인과 피상적이지 않은 진실하고 깊은 소통이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았겠는가? 세상 끝에서나마 모성을 간직한 여성을 발견하고 보살핌과 헌신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그가 구원될까? 다만 간섭을 하지 않으며 자신이 시키는 일은 다하는 여자에게서 평화를 찾다니. 그의 여성관은 여전히 구리긴 하다.           


      자기 삶의 완성이 과연 걸작을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언어표현력도 부족하고, 타인의 정서에 대한 민감성도 떨어지고, 공감, 연대성도 부족한 스트릭랜드는 사람들 속에서 평화와 만족을 구하기 참 어려웠을 것 같다. 순종적으로 행동하며 살았으나 좌절과 분노가 누적되었으리라.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고 배려하거나 베풀지 않는 환경에서 그는 인간으로서 자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은 뒤로 하기로 한다. 그러나 역시 그가 스스로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인간의 헌신과 애정이었다. 그는 이를 그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준 대상으로 끝까지 그렇게 여기다 떠났겠지만, 그의 편벽함에도 그에게 마음을 쓰며, 배려하기 위해 행동한 사람들에 의해 그의 삶과 가치 실현도 발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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