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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맛과 철학 Aug 01. 2024

초콜릿 문제

아이에게 언제 초콜릿을 먹일 것인가?

이번 글에서는 "초콜릿 문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를 위해서 우선 초콜릿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나는 초콜릿을 참 좋아한다. 초콜릿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유럽식, 처음으로 만들어진 방식과 신대륙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미국식이다. 나는 미국식 '허쉬' 초콜릿도 좋아하지만, 유럽식 방식으로 만든 한국의 밀크 초콜릿을 더 선호한다.



초콜릿은 본래 음료였다. 멕시코의 메시카족이 만든 '쇼콜라틀'이라는 음료는 카카오 빈과 고추로 만든 아주 쓴 음료였다. 이 음료는 얼마나 썼는지 고추의 매운맛까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콜럼버스가 4번째 항해에서 카카오 열매를 가지고 유럽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초콜릿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전 세계를 열광하게 만든 것일까?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아즈텍을 정복한 후, 유럽인들은 카카오빈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고국의 왕 카를로스 1세에게 진상하는 과정에서 귀족층에게 쇼콜라틀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즈음에는 유럽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매운 맛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쓴 음료'가 어떻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유추해볼 뿐이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사람보다 '우아'하길 바라는 그리고 '차별'됨을 과시하고 싶은 귀족들의 마음이 초콜릿을 퍼지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쓰고 맛없는 초콜릿을 마시면서 다른 귀족에게 '넌 이런 거 모르지?'하는 눈길을 보냈을 수도 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마시기에 쇼콜라틀은 너무도 쓴 음료였다는 것이다. 그 쓴 맛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설탕을 넣기 시작했다. 설탕을 잔뜩 넣은 쇼콜라틀은 먹을 만했고 오랫동안 사랑받게 된다. 그럼에도 쇼콜라틀은 여전히 '음료'였다.


1828년 네덜란드의 판 후텐이 카카오매스를 압착해서 카카오버터를 만들었다. 이 방식은 각국으로 퍼졌다. 그 이유는 카카오 버터의 저융점, 안정성, 유화 성질, 그리고 윤기와 광택 같은 성질 덕분에 초콜릿을 성형하기 매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카카오버터를 성형판을 통해 크림에 초콜릿을 입히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후 다니엘 페터와 앙리 네슬레에 의해 오늘날의 밀크 초콜릿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드디어 쓰기만 한 음료 쇼콜라틀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밀크 초콜릿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런 방식을 차용해서 만든 초콜릿이 앞서 말한 유럽식 초콜릿이다.



그럼 미국식, 이른바 '허쉬'초콜릿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창업주인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Milton Snavely Hershey, 1857년 9월 13일 ~ 1945년 10월 13일)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허쉬는 사탕 제조업에 관심을 가지고 젊은 시절 첫 사탕가게를 열었다. 비록 첫 사업은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10년 후에 캐러멜을 만드는 회사를 차리게 된다. 그때 차린 랭커스터 캐러멜은 4년 만에 공장 2개에 노동자 1300명을 고용하는 중견기업이 된다.


하지만 그는 3년 후 돌연 회사를 매각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1893년 만국 콜롬비아 박람회에서 독일의 초콜릿 제조기계를 본 그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즉시 기계를 구매해서 회사에서 초콜릿을 생산해보기 시작했다. 확신이 들자마자 그는 100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하고 '허쉬 초콜릿사'를 창업한다.



밀크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유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농축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허쉬는 이러한 우유 농축 기술을 유럽의 앙리 네슬레에게 전수받는 데 결국 실패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많은 노력 끝에 그는 독자적으로 농축법을 개발한다. 그의 방식은 대량 생산에 더욱 적합한 방식으로 이제는 허쉬만의 영업 비밀이 되었다. '허쉬'는 사치품이던 초콜릿을 모두가 즐길 수 있게 만든 공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허쉬 방식에는 부탄산(Butyric acid, 낙산)이 남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유럽식 초콜릿에 익숙한 소비자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큼한 맛'은 어느덧 '허쉬'의 고유한 특징이 되었고 강점이 되었다. 그 이유는 그 맛이 '다른 맛'이지, '저급한 맛'은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세상 모든 일에는 역사가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음식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재미있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좋아한다. 이제는 세상에 널려있는 이 초콜릿이라는 음식도 언제는 사치품이었고 꿈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알고 나면 초콜릿을 먹을 때마다 생각나 그 맛과 기쁨을 더한다. 그래서 유명 레스토랑에 가면 음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닐까? 그저 달콤한 간식인 초콜릿의 여러 면모를 보면 참 재미있다. 허쉬에게는 초콜릿이 그저 단 간식이 아니라 그의 철학, 그리고 인생을 담은 물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다뤄 볼 주제는 '초콜릿 문제'이다. 몇 년 전 어린 아이가 당근을 먹고 달콤해서 눈이 동그래지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전까지 나는 당근을 달콤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향이 강하고 맛이 강한 탓에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음식이라고만 생각했다. 당근을 한 번 먹어보니 의외로 꽤 단 맛이 났다. 나는 왜 그동안 그 사실을 몰랐을까?


이 별볼일 없는 주제를 가지고 나는 꽤 오랜 기간 고민했다. 그리고 생각해낸 가설은 바로 '초콜릿 가설'이다. 사실 '아이스크림 가설'이 될 수도 있고 '사탕 가설'이 될 수도 있었다. 당시에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초콜릿이었을 뿐이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이 민감하다. 작은 바람도 아이에게는 처음 겪어보는 큰 파동이고 옅은 향기도, 빛도, 소리도 어린아이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들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세상에 알고 싶은 것도 참 많다. 가끔은 부모가 힘들 만큼 칭얼대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은 세상이 즐겁다. 세상에 대한 '역치' 혹은 '민감도'가 낮기 때문이다.


당근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는 당근이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단 음식이다. 그 단맛에 아이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표정은 숨기지 못하고 내비쳐서 바라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그럼 아이가 언제 단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느냐? 하면 필자는 처음 초콜릿을 먹었을 때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이스크림이 될 수도 사탕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초콜릿은 상징적인 것이다.


초콜릿을 처음 먹으면 순식간에 아이의 단맛에 대한 '역치'는 저 하늘로 뚫고 올라간다. '오오 세상에 이렇게 단 맛이 있었다니,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하는 감탄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우러날 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 순간부터, 더 이상 '당근'은 달게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근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몇몇 당근의 '향'이나 '식감' 등을 좋아하던 아이는 아직 좋아할지 모르나. 그들도 '초콜릿'을 먹은 후에는 '당근'을 달게 먹지는 않을 것이다. 달콤한 맛에 가려진 강한 향과 다른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내 향이나 식감을 좋아하던 아이조차 전보다 덜 좋아하게 된다.


그런 아이를 부모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근을 잘 먹던 아이가 당근을 돌연 먹지 않으니, 억지로 먹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당근을 싫어하는 아이가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단언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이 세상 복잡한 일들을 어찌 전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바로 이때 '초콜릿 문제'라는 것이 생긴다. 과연 아이가 몇 살일 때, 우리는 초콜릿을 먹일 것인가? 바로 먹일 것인가? (아이가 초콜릿을 먹어도 건강상으로 문제가 없을 때), 아니면 안 보여줄 것인가?(적어도 나는 먹이지 않겠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금지할 것인가? 필자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초콜릿을 너무 빨리 먹이면 좋을까? 아니, 전혀 아니다. 그것은 아이의 당근을 먹는 기쁨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그외 수많은 단 음식들을 즐기는 행복도 빼앗는 것이다. 시작부터 행복의 역치를 무진장 높여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먼저 주고 아이가 고통받지 않기를 원한다. 대부분의 부모는 '초콜릿'쯤이야 마음껏 내줄 수 있다. 처음 아이는 초콜릿을 받고 엄청난 기쁨을 얻는다. 그리고 부모도 함께 행복하다. 하지만 어느새 아이는 초콜릿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더 단 음식을, 더 많은 초콜릿을 찾는다. 아이들은 그 이유를 모른다. 그냥 먹고 싶을 뿐이다. 그제서야 부모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초콜릿을 금지해야 할까? 아니, 역시나 전혀 아니다. 필자는 금지한다면 오히려 더 나쁜 방향으로 갈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초콜릿을 먹는 것을 영원히 금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초콜릿을 못 먹게 할 수 있는가? 이미 올려버린 '역치'를 돌릴 수 있는가? 절대로. 현대 사회에서 전혀 불가능하다. 실현하다라도 그것은 아이의 행복을 더욱 강탈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금지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아이가 초콜릿을 더 먹고 싶게 한다. 언젠가 당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아이는 커다란 초콜릿 한 통을 훔쳐와서 전부 먹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아이가 스스로 깨닫고 성장하기를 절제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콜릿이 존재하는 한 아이는 그것을 먹고 또 원하게 된다. 반드시 아이는 초콜릿을 먹고 당근이 싫어진다. 다 자란 아이는 집을 나서고 위험한 일을 하며 고통받는다. "어쩌면 그건 막지 못하는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아직 '언제'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초콜릿을 먼저 권하지 않고 어느 날 우연히 아이가 초콜릿을 요구하면 기꺼이 내어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아이가 초콜릿을 접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단 것들'을 즐기기를 바랄 뿐이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행복은 항상 일순간이고 언제나 빠르게 지나간다. 그 뒤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슬픔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랑하기 때문에 불가능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그들의 마음은 옳다. 하지만 이 따뜻한 비극이 언젠가 끝나기를 바란다. 되돌아보면 사실 스스로의 삶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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