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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맛과 철학 Aug 23. 2024

기차 안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8월의 끝자락, 유난히 덥고 습한 날씨에도 기차는 파르르 떤다. 오래된 구식 기차라서 그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글을 쓰기가 어렵다. 입석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다. 금요일, 아직 네 시 즈음밖에 안 된 시각인데, 기차는 이미 만석이다. 부산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의 입석칸, 몇몇은 의자나 편한 벽에 기대어 있다. 서서 있는 것이 힘든 사람은 한 번씩 좌석을 훑어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리는 쉽게 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있다. 잠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의자에서 졸고 있고, 그 외의 승객들은 손바닥만 한 화면을 저마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한국에서 기차를 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적막한 기차에서는 철길을 가로지르는 기차 소리와 삐걱대는 소음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 기차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나는 일부 기차들이 30년, 더 나아가 40년 동안 운행된 것을 안다. 그동안 많이 고치고 개조되었겠지만, 그 뼈대는 항상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심하게 떨고 있는 이 빛바랜 열차가 우리의 삶과 변화를 지켜봤으리라. 나는 이 기차가 마치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같이 느껴진다.


30년 전, 입석 기차는 낭만이 가득하던 곳이었다. 젊은 학생들은 기타를 가지고 와서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막걸리를 가져와 마시며 시간을 떼우기도 했다. 기차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여행 일정이 변경되는 일도 흔했다. 그 시절 사람들 간의 거리는 비교적 가까웠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기차는 여전히 후루룩 떤다. 앞뒤로 심하게 흔들린다. 내 앞의 아저씨는 팔짱을 낀 채 앞으로 휘청, 뒤로 휘청한다. 그가 손잡이를 잡지 않는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고집스러운 인내심이 엿보였다. 그 모습이 퍽 재미있다. 그 옆에는 히잡을 쓴 외국인과, 막 여행을 가거나 돌아가는 듯한 여행객이 자기 몸만 한 캐리어를 들고 앉아있다. 여전히 열차 안은 고요하다. 덕분에 읽고 싶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잘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힘없고 내성적인 주인공 "빌 펠롱"이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작은 행동 하나가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큰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주인공이 출근해서 잠들 때까지의 작은 결정들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침에 출근할 때 평소와 다른 길로 가는 것만으로도 미래는 바뀐다. 소설은 우리가 잊고 있던 그런 사실을 되새겨준다.


120페이지에 불과한 아주 짧은 소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크다. 한 글자 한 글자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 특히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그로 인해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잘 다룬다. 정밀하게 설계된 기계 부품처럼 문장, 단어 하나하나가 함께 움직인다.


나는 책을 읽으며 어쩌면 인생의 가치는 굵직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아주 작은 단편들과 볼품없는 선택들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무슨 선택을 하고 사는가? 매일매일이 선택의 연속이지만, 일상 속 작은 선택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인생의 빅 이벤트! 큰 전환점 같은 선택들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선택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기술이 놀랍도록 발전한 2024년, 세상은 고요해졌다. 무엇이 변했을까? 열차는 그대로이다. 사람도 그대로이다. 손에 들어오는 작은 휴대폰, 그것 때문일까? 30년의 세월을 넘어, 기차는 아니, 사회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우리 모두 소통해야 해요!”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침묵이 더 나을 때가 있다.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기분 나쁜 눈길을 주는 것보다 손안의 작은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열차에는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도 하나 없다. 저마다 갈 곳 잃은 눈으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화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은 사람들과의 소통 창구이자, 이제는 하나의 세상이다. 고요한 현실과 다르게 그 세상은 오늘도 너무나 시끌벅적하다.


나도 손안의 작은 세상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었다. 그러다 가끔 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기차를 잘못 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주변을 둘러본다. 바다 너머 먼 곳들의 이야기, 가상의 오락보다는 지금 살아가는 내 삶과 주변의 모습이 훨씬 가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있다. 마치 오뚜기같이 흔들린다. 그리고는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한다. 다리가 아프신가 보다. 그 옆에는 모자를 쓴 중년의 남성이 바닥에 누워 있다. 그는 신발을 벗고 고장 난 자판기에 기대어 있다. 그는 역무원에게 혼이 나고 있다. 그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자, 역무원은 119를 불러주겠다고 했고,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손사래를 치며 그러지 말라고 애원한다. 나는 그 모습이 꽤나 웃겨서 속으로 웃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눈은 스마트폰에, 귀에는 각자 이어버드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 속도에 젊은이들조차 뒤처짐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은 온다. 어떤 크고 작은 사건이든 우리는 모두 한 번씩 겪는다. 내가 한 선택이 옳은지 알 방법도 없다. 우리는 한 번 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처럼, 현재에 충실하고 주어진 내 삶을 최대한 즐기며, 마음이 가는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유일한 대처법이라 생각한다.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 항상 옳을 수는 없겠지만, 그 선택의 순간순간이 결국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주어진 시간을 최선으로 채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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