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 아이들 버전의 소년이 온다. <반딧불이의 묘>

영화 <반딧불이의 묘>를 보고

by 김태경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는 세상을 읽는 매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혼자가 아닌 집단이 제작하는 과정에서 공통적인 전망과 사상이 드러나고, 영화가 존재했던 당시의 가치관, 집단의 욕망, 불안들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심화되는 계급 양극화 현상과 더 이상 신분상승의 가망이 없는 경쟁의 사다리에서 추락한 주변부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영화라 볼 수 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돌봄을 주는 '가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혹한 학살의 역사를 겪지 않은 내 세대는 교과서를 통해 전쟁은 무서운 것이구나,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저렇게 죽였구나 하는 지식을 배웠다. 교육의 궁극 목표는 평화, 공존, 질서 같은 것들이 이 시대를 사는 시대정신이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일 텐데 내가 교육 대상이었던 1980~90년대는 오직 대입을 위한 영어, 수학, 과학 과목이 중요했던 시대라 역사니 사회 정치니 하는 것은 부수적인 과목이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인류의 역사, 역사 속 인류의 행태를 주로 영화와 책을 통해서 배웠다. 영화야말로 책 속 글자가 시공간을 초월해서 눈앞에는 펼쳐지는 보이는 역사책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의한 시대를 향해 온몸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을 그린 영화나, 잔인하고 서글픈 식민 시대에 가망 없어 보였던 조선의 독립을 꿈꾼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가 건네는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애국심과 자부심까지 안겨 준다. 그러고 보면 크라카우어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짊어져야 할 무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드워드 버거 감독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샘 멘더스 감독의 <1917>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비추며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나, 전쟁은 왜 하는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쟁은 무엇을 남기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참전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침략국이든 피침략국이든,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은 공포에 떨며 허망하게 죽음을 맞고,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살점이 찢기고 잘려 나간다. 어느 편에 속해 있든 많은 여인들이 남편과 아버지, 아들을 잃고, 겨우 살아 돌아왔다 해도 전쟁터에서의 기억은 평생 상처로 자리한다. 이 같은 영화들이 전쟁터를 필름 속에 구현함으로 전쟁의 참담함을 이야기했다면,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이의 묘(火垂るの墓, Grave of the Fireflies>는 전투 장면 하나 없이 전쟁이 주는 극한의 슬픔을 관객에게 일깨운다.


1984년에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흥행 후 설립된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아사오 감독 두 사람을 기둥으로 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까지 흥행에 성공한 이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는 그것이 <이웃집 토토로>였고, 타카하타 아사오 감독에게는 <반딧불이의 묘>였다. <반딧불이의 묘>는 일본이 패전국이었던 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인 데다 어린아이가 죽는 영화였으므로 창작자의 숱한 고민 끝에 완성에만 3년이 걸렸다. 일본에서는 1988년에 개봉했지만 일본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무려 26년이 지난 2014년에나 개봉되었다고 하니 전쟁의 상흔은 참으로 뿌리 깊고 아픈 듯하다.


영화 <반딧불이의 묘>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1945년 9월을 얼마 앞둔 시점의 이야기이다. 14살 세이타는 4살 배기 동생 세츠코를 업고 대피소로 달려가고 있다. 공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세이타의 마을은 불길에 휩싸이고 엄마마저 태워버린다. 세이타는 세츠코를 데리고 먼 친척 집으로 가지만 먹을 것도 변변치 않던 시절에 인심 마저 바닥나며 남매는 친척 집을 나와 냇가 옆에 위치한 방공호를 집 삼아 살기 시작한다. 더 이상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진 남매는 소꿉놀이하듯 밥도 해 먹고 빨래도 하지만 노숙생활과 다름없는 방공호에서의 생활이 아이들에게 좋을 리가 없다. 특히 4살 세츠코에게는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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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 타임이 88분에 불과하고, 전투 장면 하나 나오지 않음에도 영화는 두 아이가 처한 극한 상황을 통해 전쟁의 참담함을 보여주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애니메이션이 된다.


# 4살 세츠코와 14살 세이타에게 투영되는 복잡한 감정들

세츠코는 그저 배고프고 목이 마른, 달콤한 사탕 한알이면 활짝 웃는 4살 꼬마 아이이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세츠코는 툭하면 대피소로 숨어야 하는 것이 싫고, 말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을 뿐이다. 캄캄해서 무서웠던 방공호에서의 어느 밤, 램프가 되어 밝혀주었던 반딧불이가 다음 날 아침 모두 죽자 반딧불이를 정성껏 땅에 묻어주던 세츠코는 엄마도 땅 속 무덤이 있다며 줄줄 눈물을 흘린다.

오빠 세이타는 어린 동생을 업고 안으며 돌보고 살 곳과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지만 그도 고작 14살 아이에 불과하다.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간 엄마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세츠코의 보호자여야 했던 세이타는 세츠코와 대비되어 마치 큰 어른처럼 보여지지만, 영화는 세이타가 겪었을 전쟁의 충격과 두려움을 영화 내내 응축해 두었다가 영화 말미에 허망한 죽음으로 그의 상실감과 무력함을 나타낸다.


영화는 너무나도 귀엽고 예쁜 세츠코를 묘사하며 관객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데 그중의 절정은 세츠코가 내 아이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세이타도 마찬가지이다. 오후 4시만 되면 학교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동네 중학생 아이들 중에 하나여야 할 세이타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동생을 돌보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두 아이의 모습과 두 아이에게 투영되는 절망적인 안타까움은 '전쟁은 참담함밖에 없다'는 절대 명제로 귀결되고, 혹시 진짜 전쟁이 나면 내 아이들이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먹먹을 가져오며 현실감을 배가시킨다. 그만큼 영화 속 캐릭터와 이야기는 관객의 감성적 몰입에 성공하며 실사 전쟁 영화 못지않은 전쟁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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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에 이미 담겨 있는 패전국의 참상

우리나라 개봉 당시 영화 속 표현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네이버 평점에는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이런 영화나 만든다며 일본을 비난하는 말도 있고, 세이타의 아빠가 해군 대위 급의 군인으로 나오는 것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책 <지브리의 천재들>에서는 이 영화가 일본 내에서도 일부 비난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 장군의 자녀 중에 그런 아이들은 없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짧은 소감도 있고, 애니메이션을 지나치게 무섭고 심각하게 만든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되었음에도 만화가 이토록 슬프면 안 된다는 정서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침략국이자 패전국이었던 국가에서 이 같은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침략국의 해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두 아이의 아빠가 탄 배는 바다에서 몰살했으며, 평범한 주부였던 아이들의 엄마는 만화라지만 보기 거북할 정도의 폭격 화상으로 죽기 때문이다. 세이코 역시 4살 아이가 감당하기엔 냉혹하고 비참한 생활을 해 나가며, 먼 친척 정도 되는 숙모는 14살 세이타에게 국가를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게으른 사람은 쌀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며 죽만 준다. 동네 농부는 주먹밥을 먹으면서 아이들의 구걸을 외면하고, 경찰은 세이타에게 어른 행세나 하며 손에 아무것도 쥐어주지 않은 채 돌려보낸다.

영화는 이 가엾은 아이들에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도 돌봄 받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결말을 보여준다. 만약 혹자의 말대로, "우리는 비록 전쟁에서 졌으나 전쟁은 타당했다"거나 "우리는 패전했을지라도 여전히 대일본제국이 자랑스럽다"거나 "우리야말로 미국의 무참한 공격의 피해자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이 영화는 완전히 잘못 만들어진 셈이 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는 아이들이라는 전인류적 보편 진리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며 다시는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애니메이션 최대 강국인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의 방식으로 자성하는 작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세이타와 세츠코의 이야기

세이타와 세츠코는 처음 대피소를 향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붉은색 조명 아래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마치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덕 위 나무 의자에 앉아 전쟁이 끝나고 한껏 화려하고 높아진 현재의 도시를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세계 곳곳에는 정치 논리를 명분 삼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힘이 센 우리가 공격해서 이기면 된다는 허무맹랑한 허세가 전쟁의 시작이라면, 세이타와 세츠코 같은 아이들은 전쟁의 결말일 것이다. 이 두 아이는 침략국의 아이들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는 부모와 집을 잃고 언제 울릴지 모르는 공습경보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부디 그 아이들이 안전한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매일 느끼며, 배불리 먹고 웃는 일상을 되찾길 바란다. 세상은 총과 폭탄 터지는 소리 속에서, 배고프고 무서움에 떠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신나고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곳이어야 정상인 법이니까.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며 즐거운 세이타와 세츠코처럼 말이다.


OTT의 점령으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서 언제든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마음대로 멈추었다 재생할 수 있고, 지루하다 혹은 대사가 너무 길다 싶으면 빨리 감기로 장면을 선택해서 볼 수도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인지 구독자들을 더 머무르게 하기 위해 좀 더 자극적인 소재와 좀 더 폭력적인 전개 방식을 택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많아진 것 같다.

하지만 꼭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폭력 장면으로만, 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잔인하고 거북한 장면으로만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K-문화를 보유한 우리나라 관객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화적, 예술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을 수 있으므로 좀 더 투박하더라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보이는 것 같은 작품을 더 많이 만들면 좋겠다. (아마도 [존오브인터레스트]와 이 영화 [반딧불이의 묘]가 해당되지 않을까)


너무 과한가 싶지만, 영화의 역사적, 사회적 기능을 무겁게 받아들여서 현재에는 교훈을 남기고, 미래에는 흔적은 남겨 모든 세대에게 기념이 되는 영화들이 많아 만들어졌으면 한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