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를 보고
우리는 많은 영화를 통해서 역사 속 인물들을 봐 왔다.
스크린에 재현되는 그들은 대부분 폭발적 에너지를 가지고 정의를 위해 앞장섰거나, 실패가 뻔한 전투에서 승리했거나, 죽음을 불사른 투혼과 희생으로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비극적 역사에 맞섰던 사람들이었다. 1987, 택시운전사, 변호인, 노량(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하얼빈 등이 그럴 것이다.
무릇 기승전결, 특히 극적 클라이맥스가 중요한 영화 매체의 특성상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위국(危國)의 순간은 영화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들을 골라 도래하지 않으므로, 영화는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줄 의무가 있다 할 수 있다.
영화 <동주>는 대한민국에서 중학교까지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윤동주가 사망 전 후쿠오카 감옥에서 일본 경찰에게 취조를 받는 현재 장면과 과거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윤동주가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거나 총이나 폭탄을 들고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으므로 영화는 내내 윤동주의 형제와 다름없는 사촌 송명규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내향인과 외향인, 몸부림의 모양이 다를 뿐. 고통은 다르지 않다.
나는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볼 때마다, 약간의 자괴감을 느낀다. 내가 저 시대를 살았다면 저이처럼 목숨을 걸 수 있었을까, 나라의 독립을 내 전부요 미래라 여기며 절실할 수 있었을까.. 늘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도 나는 어김없이 송몽규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의지와 실행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도 못하고, 머리도 나쁘고, 몸이 빠르지도 않고, 결단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나 같은 사람은 송몽규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송몽규의 적극적이고 변화무쌍한 행보는 지극한 내향인으로 보이는 윤동주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읽는 한심한 청년으로까지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윤동주와 송몽규가 받는 고통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윤동주의 글은 후세에 기념되고 있고 문학으로도, 시로도 특히 비극을 머금은 아름다움으로도 독립을 주창할 수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아픈 고통을 어떤 형태로 표출하는지 사람마다 다를 뿐, 그들이 처한 고통의 크기와 강도는 다르지 않다. 하늘의 별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슬픔과 억울함, 소망을 담아 쓰던 윤동주의 시는 마치 신을 향한 아름답지만 처절한 기도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 윤동주의 심심함 그리고 세심함을 소재로 한 재미없는 영화, 그의 시가 영화가 된다.
사실 이 영화는 딱히 재미있다고 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혁명을 꿈꾸던 송몽규의 모의는 실패로 돌아갔고, 윤동주의 섬세하고 나긋나긋한 시는 그의 살아생전에 출판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적 요소라곤 어느 한 군데도 없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 그래서 이제까지 그 유명한 윤동주의 전기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건가 보다.
하지만 영화는 조국의 해방을 꿈꾸던 두 젊은이들의 짧은 인생을 보여주며, 그들을 묵묵히 기념해 나간다. 이 영화가 선택한 극적 클라이맥스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새로운 길], [서시]와 같은 시들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심경에서 쓰였을지를 보여주며, 관객으로 하여금 시인의 마음을 유추하게 하며 강하늘 배우의 내레이션으로 그의 시를 듣도록 하는데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시는 교과서 밖으로 나와 그의 인생을 덧입고 새롭게 다가오게 된다.
영화적 소재가 전혀 없는 역사적 인물임에도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영화를 제작한 것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사회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의 관점에서, 영화는 필름을 통해 역사와 현상을 기념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관점에서 이 영화는 순수성을 얻는다.
# 강하늘, 박정민으로 인해 부활한 윤동주와 송몽규
잘 알지 못했던 송몽규는 배우 박정민으로 부활하여 윤동주와 상극인 에너지로 영화를 주도한다. 교과서에서 시로만 보았던 이름 시인 윤동주는 배우 강하늘로 인해 재현되는데 그의 무표정과 허약해 보이는 얼굴은 흑백화면에 매우 잘 조화되며 영화에 매우 적합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터질 듯 터지지 않는 극 중 윤동주의 불안과 분노, 서러움은 미동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나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 뒷모습에서 읽히고 시로, 목소리로 읽힌다. 송몽규와 윤동주가 그랬듯, 서로에게 매우 최적화된 캐스팅이다.
# 두 인물만큼이나 순수하고 담백한 연출
나는 누가 더 영웅스러운지가를 말하지 않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든다.
대부분의 영화가 인물들의 갈등을 점차 증폭시켜 나가는데 반해 이 영화는 두 인물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을 받아들이고 선택해 나가는 전개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누가 옳은지가 아니라 각자 어떻게 살았느냐를 볼 수 있게 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지만,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두 사람의 27년 짧은 생애의 연대기를 동시에 보여주며 그들을 기린다. 어쩌면 이 둘이 같은 해에 태어난 사촌이라는 사실, 완전히 다른 성향의 두 인물이 서로를 친구요 형제로 함께 지냈다는 사실, 일제 식민지를 함께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은 해에 같은 감옥에서 원인불상이라는 같은 이유로 죽었다는 사실이 가장 영화적인 요소인 것 같다.
영화는 이 두 인물의 운명 같은 연대기를 극적으로 이용하여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드라마를 연출하지 않는다. 다르지만 함께 했던 두 인물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연출을 택함으로써 영화는 더욱 순수하고 돋보이게 되었다. 이준익 감독이 가지고 있는 담백한 연출력과 참 잘 어울리는 이야기, 인물이었던 것 같다.
OTT는 매주 새로운 영화와 시리즈물을 쏟아낸다.
사람들은 OTT가 나열해 주는 홈 화면에서 영화를 선택하곤 한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잔잔하게 설렘을 가져다주는 사랑 영화가 보고 싶어지고,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지만 부담스럽거나 과하지 않는 영화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싶어진다.
화면에 온갖 선혈이 낭자하고 욕설과 폭력을 화려한 미장센으로 꾸미는 영화들 보다는, 가끔은 고요하지만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 단조로워 보이는 화면이지만 삶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영화들이 더 많은 여운과 교훈을 남겨주곤 한다.
이번 주말엔 이런 담백한 영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