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지브리의 천재들>을 읽고
타고나길 원체 천재적인 사람들이 있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땀으로 만들어진다고 하고, 세상 모든 천재 중 인내와 노력이 없었던 천재는 없었다고들 말하지만 천재가 아닌 내가 볼 때 저 말들은 그저 나를 토닥거리는 위로의 말로 들릴 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를 처음 봤던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피구왕 통키, 달려라 하니,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만화만 보다가 저토록 아름답고 예쁜 선율의 음악을 만화에 삽입한 것이 충격적이었다. 대체 누가 만화영화 따위에 어른들 영화에나 넣을 법한 훌륭한 음악을 넣는단 말인가!
그 이후로 한동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덕후로 시간을 보냈다.
<모노노케 히메>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NEW 밀레니엄 시대를 염원하던 그 시절,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 조화 속에 살아야 한다는 엄중한 예언 같은 영화였고, <천공의 성 라퓨타>, <벼랑 위의 포뇨>는 애니메이션도 필름영화 못지않은 감동과 인류애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 아이들도 즐겨 보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아직도 더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입을 떡 벌린 채 보게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위대한 창의력과 상상력에 경이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 번복 작인 영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개봉 첫날 극장에서 관람했고, 내용이 약간 난해하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묘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경륜과 관록을 지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필름 영화계에 있다면 애니메이션계에는 미야자키 햐아오가 있으니까.
#지브리의 천재들 (2021, 스크지 도시오 지음)
도서관에서 우연히 <지브리의 천재들>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좋아하는 영화들 이야기여서 그런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 책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이사 겸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가 썼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설립도 되기 전 애니메이션 잡지 편집자였던 저자가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다 아사오 감독을 만나 애니메이션 제작자로서 첫 발을 내디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1984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시작으로 2018년 다카하타 아사오 감독이 사망한 해까지 지브리 제작 영화들을 나열하며 저자가 경험하고 목격했던 에피소드들을 통해 미야자키 햐아오 감독과 다카하타 아사오 감독, 스튜디오 지브리를 말한다.
#어설프게 대충 만들어졌던 이름 지브리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 된 것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독창성과 실험적인 제작방식, 폭넓은 장르와 창의적인 스토리텔링 방식 등에 기반한 세계적 흥행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세가 넘은 두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다 아사오의 뒤를 잇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미야자키 고로 같은 감독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도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만큼 흥행 기록이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30~40년 전 만들었던 지브리의 영화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보아도 전혀 손색없는 스토리와 작화를 자랑하며 레전드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지브리가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애니메이션 잡지 만드는 일을 갑작스럽게 맡게 된 스즈키는 여고생들에게 인기만화라 전해 들은 애니메이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기사로 페이지를 메꾸기 위해 감독을 접촉하고 이때 다카하아 아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나게 된다. 애니메이션 영화 기획을 위해 잡지 연재를 먼저 시작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연재물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고 이후 단행본을 발간하지만 처참한 성적을 거둔다. 영화화를 위해 어렵게 투자자를 찾은 스즈키는 미야자키를 감독으로, 다카하타를 프로듀서로 시작하지만 작품을 함께 만들 스텝들, 즉 제작 회사가 없었다. 수완 좋은 스즈키의 노력으로 외부 제작 회사 톱 크래프트와 함께 만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흥행에 성공하고 이후 스튜디오를 직접 설립하기로 하고 이름을 지브리로 한다.
지브리라는 이름에 대단한 의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책 속에서)
"한편 스튜디오의 이름을 둘러싸고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최종적으로 미야가 정했다.
'이탈리아의 군용 정찰기 중에 지브리라는 게 있거든. 스튜디오 지브리로 하고 싶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gibli라고 알파벳으로 써서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외국어를 잘하는 다카하타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봐 정확한 발음은 기블리 아닌가?'
'아닙니다. 이탈리아 친구가 지브리라고 했어요'
그리하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름의 스튜디오가 탄생했다. 나중에 기블리가 맞다는 게 밝혀 저서 전 세계 사람들은 모두 스튜디오 기블리라고 부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냥저냥 대충 하지 않는 대쪽 같은 고집불통의 완벽주의자 감독들
저자 스즈키는 책에서 미야자키와 다카하타가 어떤 사람인지를 들려준다.
(책 속에서)
"내가 미야에게 감탄한 점은 굉장한 수다쟁이인 그가 작화에 들어간 순간, 쓸데없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침 9시부터 새벽 3~4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 가져온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이등분해서 아침과 저녁에 절반씩 먹는다. 그 이외는 오직 일만 했다. 음악도 듣지 않았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현장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결정이 빠른 것도 미야의 장점이다. 그 자리에서 불과 5분 만에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놉시스를 줄줄 읊은 것이다. (중략) 제목은 원래 <소년 파즈, 비행석의 수수께끼>였지만 내용은 거의 지금과 똑같았다.
'계속 생각하신 겁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생각했어. 수학 시간에 세타라고 배웠지? 그 단어를 본 순간, 주인공 이름을 쉬타로 하기로 정했거든'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제작을 앞두고 미야가 내놓은 조건은 한 가지였다.
'다카하타 씨를 프로듀서로 하고 싶어'
그날 바로 다카하타를 찾아가서 부탁했는데, 한 달간 매일 찾아가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대학 노트 한 권에 '프로듀서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각종 연구 결과를 빼곡히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노트의 맨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프로듀서에 맞지 않는다.'"
# 천재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해 내는가가 중요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아사오의 작화, 스토리텔링 능력은 천재적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두 거장은 자신의 재능을 그냥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통제적인 시공간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둔 채, 머릿속에 이야기를 연필로 수백 번 수만 번 다듬고 그려내는 고독과 고통의 시간을 거쳐 세계가 사랑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었다. 어디 이뿐인가. CG의 도움 없이 단 4초를 위해 1년 3개월을 투자하는 제작자였고, 수천 장의 장면을 연필로 직접 그려 80분짜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장인들이기도 하다.
시대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굳건한 세계관과 이를 기어이 표현하는 끈기와 고뇌는 타고난 재능 1%를 가지고 99%의 완고한 리얼 노력을 들여 창작자로서의 자부심, 시대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이야기꾼으로서의 사명감을 완수한다. 그리고 이들의 재능과 노력은 걸작 애니메이션 영화로 다시 시대에 환원된다.
지브리 풍으로 순식간에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하여 미야자키 햐야오는 이렇게 말했다.
“AI가 그린 결과물은 실제 작업하며 만드는 사람의 고통을 전혀 모른다. 완전히 역겹다"
누가 이 말에 토를 달 수 있을까.
재능을 질투하고 욕망하는 것을 넘어 시대 속 자신의 세계관을 마주하고, 고통과 고뇌를 기꺼이 감당하며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힘이 삶을 빛나게 한다는 익숙한 교훈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천재들을 통해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