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에 웃는 얼굴로 <드라이빙 미스데이지>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보고

by 김태경

출근길이었다. 곧 내가 지나가게 될 인도에 차가 한 대 서더니 차에서 초등학생 두 명이 내렸다. 등교를 위해 아이들을 학교 앞에 데려다주는 학부모의 차였다. 두 아이는 차의 뒷문을 열고 내려 뛰어서 갔는데 문제는 차 문을 안 닫고 간 거였다. 차 안에는 아이들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분이 운전석에 앉아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야! 문 닫고 가야지"

그때 마침 내가 그 차 앞에 도착했고, 나는 얼떨결에 그 차 뒷문을 닫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이들은 이미 떠나 다시 돌아올 리가 없고, 저 아빠는 문을 닫으려면 내려야 했고, 그럴 바엔 마침 차 앞에 있는 내가 차 문을 닫아 주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문을 닫고 나니 매우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차 속 운전석에 앉은 아빠는 내게 고맙다고 말하며 크게 웃었고 나 역시 크게 웃었다. 나의 행동은 동선상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에도,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던 탓인지 감사하는 쪽과 별일 아니라고 답하는 쪽 모두 어이없지만 기분 좋게 크게 웃으며 각자의 길을 갔다.


문을 닫아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에너지나 시간을 쓰는 일도 아니었고, 나에게도 저런 상황이 생겼을 때 누군가가 별일 아니라는 듯 도움을 준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생판 모르는 남과 일상에서 찰나를 만났을 때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매우 드문 일이어서 특별한 경험인 것처럼 여겨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갈등과 혐오의 시대라고들 한다.

남성은 여성을 혐오하고,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를 혐오하고, 자국인은 이방인을 혐오하며, 가난한 이들은 돈 많은 이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경계를 장벽을 더 높이 세우고, 함께 편을 먹고, 과감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속에 팽배한 갈등과 혐오를 매일 보고 들으며 살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점점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생각을 말하기 두려워하며, 자기 식구만 챙기고 보호하는 것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성은 사라지고, 연대와 협력은 헐거워지며, 서로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소리만 커져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서로 이해하자, 들어보자, 기다려보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렇게 말했다간 뭣도 모르는 뜬 구름 잡는 소리 하는 사람이라며 돌 맞을까 무섭다. 사회 정치 시간에 분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말이다.


1990년 작품인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의 1950년대, 그것도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의 본고장인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유대인 할머니 '데이지'와 흑인 운전기사 '호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데이지는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고, 율법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흑인 운전기사가 자신의 부엌에서 먹을 것을 축내고 있을 거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종의 외식(外飾)하는 할머니였다. 반면 호크는 안 해 본 일이 없는 일평생 노동자의 삶을 산 생계형 운전기사, 피부색으로 차별받으며 살아온 운전기사였다.

고집불통 데이지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호크는 데이지에게 복종하면서도 특유의 유머와 위트로 데이지의 곁에서 오랫동안 맡은 일을 잘해 낸다. 이 영화가 유대인 할머니와 흑인 운전기사의 우정을 그려 낸 아카데미 작품상에 걸맞은 영화인지 아니면 흑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흑인-백인 간 우위를 보여주었던 문제작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영화 속에서 데이지와 호크가 서로를 친구로 여겼다는 것만큼은 영화적인 사실이다.

호크는 마음이 따뜻한 인물이다. 늘 유머와 위트를 장착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떠 보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상황과 장소에 맞추어서 진솔하게 표현할 줄 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호크를 연기한 모건 프리만의 웃음소리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기분 좋은 여운으로 남아 있다.


팍팍한 인심, 높아진 물가, 짜그러진 주머니 사정을 매일 실감하면서 어떻게 유머와 위트, 웃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갈등과 혐오의 원인을 분석해서 말하는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은 이제 저리 치우고, 차라리 각자의 일상에서 '유머와 위트, 웃음을 선보이는 몇 분 만들기 캠페인'을 하는 건 어떨까.

누군가와 눈 맞추고 웃는 일이 내 속에 잔존해 있는 무의식적인 혐오와 분노를 엄청 조금씩이라도 줄여 주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생판 모르는 남과 눈 맞춰 웃는다는 기분 좋은 에피소드를 체험하는 경험을 일상에서 하면 어떨까.

사회제도와 정치를 당장 바꾸는 일이 요원하다면 그냥 내 일과에서 조금씩 조금씩 내 속의 혐오와 분노를 줄여 나가 보는 거다. 웃음과 유머, 위트로..


나는 남의 차 뒷문을 닫아주고 한바탕 웃었던 그 이벤트를 계기로, 한 가지를 더 시도해 보고 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당보도를 건널 때, 스스로 멈춰서 내가 지나가가기를 기다려 준 차량 운전자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려 보여 주며 웃는 것이다. 쉬운 것 같지만 생각보다 어렵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았던 제스처에서 내 팔을 움직이는 적극적 행동으로 넘어가는 것도 쉽지 않고, 게다가 엄지를 들어 올려 운전자에게 보여주는 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행동을 통해 '당신의 행동으로 제가 잘 건넙니다. 잘했어요! 당신의 선택이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 줍니다'라는 내 마음이 전해지면 그 운전자가 잠시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까?


내가 운전할 때 길을 건너는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해 준다면 나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기분이 좋을 것 같다. 휴대폰 보며 웃는 것 말고, 길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내 귀를 막고 있는 것 말고, 생판 남이지만 어쩌다 눈 마주치며 웃는 경험이 사람들 속에 쌓이고 쌓이면 그전보다 조금은 속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그런 날들이 또 쌓이고 쌓이면, 이런 사람들이 생기고 또 생기다 보면 그전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고, 좋은 걸 한번 경험하고 나면 그 맛을 알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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