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만 J. 이스라엘, 에스콰이어>를 보고
'다이어트는 소문 낼 수록 효과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행동을 공개적으로 남들에게 알림으로써 자신이 한 말에 더 책임을 느끼고 약속을 잘 지키게 된다는 심리적 현상, 즉 떠벌림 효과(Progess Effect) 때문이다. 내가 가족들에게 "나 이제 다이어트 시작할 거야"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다. 말 안 해도 상관없고, 말한다고 해서 가족들이 내 다이어트를 특별히 돕지는 않겠지만 '내가 많이 먹으면 내게 내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줘'라는 암묵적인 부탁과 '나 이번에 성공할 거야'라는 야심이 반영되어 있다.
(물론 나의 이 떠벌림은 20년 가까이 효과가 없지만 다이어트에 대한 내 다짐, 계획, 실행 의지에는 언제나 변함이.. 없.. 다.)
돈을 쓰는 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옷을 사고 여행을 다니는 일에는 떠벌림 효과를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그 효과를 요하는 것은 내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거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들이닥칠지 모를 심리적 갈등이 예측되는 일일 것이다. 중요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일 수도 있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인생을 걸고 지켜야 하는 신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과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동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연대(solidarity)'가 없다면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아도 그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을 세상 속에서 나 혼자 나의 내면을 다독이며 불굴의 의지를 지속하는 일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영화 <로만 J. 이스라엘, 에스콰이어(Roman J. Israel, Esq.). 2017년작)의 주인공 로만은 36년간 동료 윌리엄과 인권변호사로 일했다. 어느 날 윌리엄이 심장문제로 생사를 오가게 되고 로만은 윌리엄의 변호사 사무실을 인수하려고 하지만 사실상 자선단체처럼 운영되었던 탓에 윌리엄 가족들은 폐업 절차를 밝고 윌리엄의 제자인 조지에게 사무실을 넘긴다.
조지가 큰 로펌을 운영하며 고급차와 비싼 양복을 입고 다니는 변호사라면, 로만은 커다란 가방을 들고 차 없이 뚜벅이 생활을 하는 가난한 변호사이다. 그는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고 수기로 모든 재판의 내용을 정리해 두고 있었으며 놀라운 기억력으로 형법을 통째로 외우는 실력 있는 변호사이기도 했다. 로만의 실력을 알아본 조지는 로만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하지만 로만은 자신은 인권을 위한 최전선에 서 있는 변호사로 당신과는 다르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로만은 구직을 시도하지만 그의 자부심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법의 개혁을 위해 연구하고 변호했건만, 사회 운동가들을 돕는다는 자부심과 헌신을 아끼지 않으며 살았건만 그를 채용해 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랜 동료의 갑작스러운 부재와 실직으로 이제 로만의 원동력은 가치나 신념이 아니라 현실을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돈이 되어 버렸다.
별 수 없이 조지의 로펌으로 들어가게 된 로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별난 변호사로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변호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접하며 마음속 갈등을 겪게 된다. 로만과 조지는 사사건건 부딪히지만, 오히려 사법 개혁에 대한 로만의 정의로움과 집요함이 돈만 아는 냉철한 조지의 마음을 움직이기까지 한다.
로만은 살인사건 피의자의 변호를 맡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건의 진범 존재를 알게 된다.
의뢰인과의 비밀유지의무가 있음에도 로만은 진범의 위치를 알려주면 현삼금을 준다는 전단지를 보고 아무도 모르게 진범의 위치를 알려주고 또 아무도 모르게 현상금을 받아 낸다.
로만은 그 현상금으로 생전 처음 산타모니카 비치의 고급 호텔에서 주말을 지낸다. 도넛 값으로 100달러짜리 지폐를 내며 88달러를 팁으로 주기도 하고 이제는 걷지 않고 택시를 탄다. 그의 손에는 오래된 커다란 서류가방이 아니라 쇼핑백이 한가득 들려 있다.
이제 그는 조지와 같이 멋진 양복을 입은 많은 변호사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나와 고급 아파트로 이사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도 한다. 현상금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 로만은 비싼 양복을 입은 채로 조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배은망덕한 사람에게 퍼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성공을 못하는 건 다 내 탓이야"
영화는 현상금을 받기 전 로만과 받은 후의 로만의 모습을 총 러닝타임의 절반씩을 할애해서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면서 로만이 왜 갑자기 그 현상금을 받기로 선택했는지 보다 '그래 사람은 누구나 저런 선택을 할 수도 있지' 하면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50년 가까운 인생을 인권을 위한 법의 개혁자로 자처하며 살았던 로만은 그 선택 단 한 번으로 인생의 비극을 겪게 된다.
로만의 잘못된 선택은 갑작스러운 윌리엄의 부재와 실직으로부터 시작된다.
뜻을 같이 하는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로만은 다소 얼마간은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켜나갔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기어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자신을 초라하거나 미련하다고 여기지 않았건만 혼자가 되니 자신을 없고, 낡고,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저 즐겁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속에 살면 얽히고설킨 많은 일들을 보기도 하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지켜지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 속에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른 가치관과 성실함, 정의를 추구하려는 이들이라면 나를 지키는 일에 더 큰 도움이 되어 주지 않을까.
좋은 학군, 있어 보이는 브랜드의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보다, 나를 바른 사람으로 지키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들, 가치와 신념이 비슷한 사람들, 그리고 나를 오랫동안 알고 나에게 싫은 소리 해 주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또 찬찬히 살펴보면,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 1인 생활 시대여서 혼밥하고 혼자 일하고 혼자 돈 번다고 해도 관심을 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유튜브나 휴대폰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긴 사람이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다면 애초에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출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나를 바른 인생으로 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다리 찢어지게 다른 사람 흉내 내며 살지 말고, 다들 저리로 간다고 뭔지도 모르면서 쫓아다니며 살지 말고,
나의 상처만 들여다보지 말고, 나의 문제도 쳐다보는 용기를 가져 보는 거다.
사람들에게 도움도 요청하고 또 다른 이들을 도우면서 말이다.
혼자서는 관용을 경험할 수 없으니까.
"관용이란 무엇인가, 인류애의 결과이다.
누구에게나 약점과 과오가 있으니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자 그것이 자연의 제1법칙이다" (영화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