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아프면 바다를 건너야 돼요’
우리 집은 삼 남매와 수제화를 만드는 부모님. 오래된 단독주택을 앞뒤 반으로 나눠서 수제화 공장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셨고, 집안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두 분 모두 장남과 장녀로 각각 동생들이 여섯일곱 명이 있었다. 수제화를 만들던 아빠는 전문적인 기술을 동생들에게 가르쳤고, 공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까지 같이 집안에서 생활하니 매일 조용할 날이 없었다.
공장 식구들 식사까지 제공했던 터라 엄마는 늘 예민하고 바빴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늘 화가 나 있었던 것처럼 보였고, 아빠는 늘 조용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는 화가 났던 게 아니라, 몸은 하나인데 돌볼 사람이 너무 많아 힘에 부치셨던 것이었다. 공장 사람들 식사를 차려주면서 우리 삼 남매 식사도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주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반 이상을 흘리면서 손으로 얼굴로 밥을 먹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빠는 장남으로 가장으로 막중한 책임감이 있었다. ‘내가 잘 돼야 동생들하고 가정을 지킬 수 있다’ 고 우리에게 교육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녀인 나에게도 본인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내가 결혼해서 살아보니, 고지식한 남편 때문에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야말로 FM처럼 사장님과 가장으로의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주위 사람들도 실수하지 않는 사장이자 형님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부모님이 워낙 성실하고, 고되게 일하기 때문에 오빠, 언니도 매우 순종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 말을 백 프로 동의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모든 일에 예스만 하는 오빠, 언니에게 조금씩 욕구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풍족하지 않았던 용돈, 지저분한 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일 학교 가기 전에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졸랐던 것 같다.
똑같이 용돈을 받아도 난 항상 부족했다. 자영업을 하던 부모님이었지만, 경제관념을 따로 배우지 않아 난 돈은 있으면 다 써야 되는 줄 알았다. 매일 돈 달라고 하는 나를 오빠, 언니는 말 안 듣는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안은 일하는 아빠, 엄마 형제들과 일꾼들로 조용할 날 없었고, 그 북적북적함이 너무 싫었다.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모르는 공장 아저씨들이 집안에 있는 것도 싫었고, 여기저기 수제화 만들 때 쓰이는 샘플 제품,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강한 본드, 그 외 화학약품, 프레스 기계, 재단 도구, 수많은 가죽시트…… 이것들을 보는 게 지겨웠다. 난 나중에 외동하고 결혼해야지 결심했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선생님, 부모님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의 표본이었다. 보수적인 부모님은 오빠한테 ‘네가 말 잘 들어야 동생들도 비뚤어지지 않는다’ 고 무의식적으로 세뇌 교육을 했다.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오빠와 언니도 아이였는데 이 때도 오빠, 언니는 예스, 예스였다. 나에게도 착한 아이가 되길 원했지만 난 항상 왜 그래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 달라고 했고, 그 질문에 부모님은 늘 화를 내셨다. 나는 오빠와 언니처럼 부모님이 바라는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식이 부모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주면서 아이들의 의견을 듣고 공감하고 질문하는 교육방침은 모르셨다. 우리의 부모님들 세대는 ‘아이의 의견을 묻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노’를 하지 않는 환경이 의문 투성이었고, 조금씩 반항심이 생겼다.
영어 수학 학원 간다고 돈을 받아서 영수에 뜻이 없음을 깨닫고, 배짱 좋게 신설동에 있는 수도학원 새벽반 일본어 수업을 끊어버렸다. 답답했던 환경, 보수적인 부모님, 한국에서 여자아이에게 홀로서기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제2 외국어로 배운 일본어가 답답했던 나의 동아줄이 될 걸 예감했었던 것 같다. 미성년자인 딸이 자꾸만 부모 품을 벗어나려고 하니 화를 내기도 하고, 설득도 해봤지만, 생각이 달라서 서로 대립만 커져갔다. 답답했던 엄마는 이모의 권유로 갓 신내림을 받은 호프집 사장님이 있다고 영문도 모른 채 나와 언니를 데리고 갔다.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낡은 나무 인테리어에 테이블 여섯 개가 있는 가게였다. 아무 생각도 없는 나를 보더니 여 사장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이 아이는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아요 혹시 아프더라도 병원 말고 가까운 제주도라도 보내세요. 그럼 괜찮아져요. 이 아이는 바다를 건너야 돼요’ 그 말에 난 감출 수 없는 환호를 외쳤고, 엄마는 깊은 탄식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