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집안의 답답함으로 갓 20살이 되던 해 나는 유학을 가고 싶었다. 공부에는 흥미도 없었고 막연하게 해외에서 살고 싶어서 어떻게 한국을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했다. 고교시절 배짱 좋게 일본어학원을 등록하여 새벽반을 다녔던 아이가 학교 공부는 잘할 리가 없지 않은가. 4년제 대학은 보란 듯이 불합격. 부모님은 재수를 권하셨다. 난 잘됐다 싶어 재수할 돈으로 유학 가겠다며 당당히 목돈을 요구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탈출만 생각하고 있었다.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철없는 딸의 당당함에 부모님은 어이없어할 말을 잃었다. 재수는 안 하겠다고 하니, 2년 제라도 보내서 품 안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를 붙잡으려 했던 것 같다. 내가 누구던가. 욕심 많은 막내딸 아닌가. 그 당시 관광산업이 주목을 받던 시기라서 2년제에 신설학과인 관광학을 지원했다. 관광학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 잘 몰랐지만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돌파구가 될 거라는 건 예감했었다.
그런데 막상 2년제 관광과에 입학한다고 하니 반대하시는 건 왜일까? 내 그릇은 작은데 부모님의 바라는 이상적인 딸의 그릇은 너무 컸던 걸까?
‘식음전폐’와 ‘히끼고모리’로 기싸움이 시작됐다.
나의 ‘히끼고모리’는 부모님의 부부 싸움의 원인이 되었고, 서로에게 자식 잘못 키웠다며 서로를 원망하는 동안 일주일이 지났다. 우여곡절 끝에 반강제적으로 협상 아닌 타협이 이루어졌다. 난 여전히 내 인생인데 왜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협상을 해야 되는지 의문투성이인 체로 협상한 듯 행동하며 등록금을 받아냈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생활은 너무 즐거운 나날이었다. 답사를 핑계 삼아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때만 해도 관광학과는 생소하고도 낯설었던 학과였다. 부모님은 놀러 다니는 게 무슨 공부냐며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학교에는 관광학과라서 원어민 일본어 수업이 있었고, 교환 유학생 제도도 있었다. 드디어 나에게 집을 떠날 기회가 온 것이다. 억지로 꾹꾹 누르며 지내왔던 내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때에는 학생비자가 6개월만 나오는 상황이었고, 부모님의 인감도장과 통장 잔고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한 달 가까이 부모님의 동선을 파악하고, 회계 장부와 인감도장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드디어 기대하던 날이 온 것이다. 두 분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외출하는 날이 두근거리면서도 설레는 상태로 인감도장을 훔쳐 빠른 걸음으로 종로 유학원으로 향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떠나고픈 마음 하나만 가지고 진행하려 하다 보니 신청하면 할수록 목돈이 필요했다. 갓 20살 아이가 어찌 알았겠는가? 유학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비자 심사 결과는 아직이었지만, 신청까지 완료했을 때 부모님께 발각되고 말았다. 난 첫 번째 좌절을 맛보았고, 부모님은 인감을 훔쳤다는 행동에 충격과 말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본인들을 자책했다. 화내는 아빠와 눈물로 호소하는 엄마. 하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잘못된 일도 미안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까지 강압적일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반항심은 극에 달했다. 내 좌절감은 어떻게 할 건데.....
부모님은 철없는 아이를 달래 두 번째 협상에 들어갔다. 우선 2년제 학교 졸업을 해야 한다. 학교 다니는 동안 한 번이라도 공부로 장학금을 받는다. 졸업 후에 2년 정도 직장생활을 해본다. 2년 후에도 유학이 가고 싶다면 그때는 부모님이 협조한다. 부모님이 내세운 조건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그때는 순순히 협상에 응했다. 한동안 부모님이 원하는 이상적인 아이인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지냈다. 물론 학교생활도 음주 가무를 마음껏 즐기며 후회하지 않을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 장학금도 받았다. 공부 잘하는 착한 아이로 기대치가 높아질까 장학금 받은 것도 알리지 않았고, 받은 돈은 과 선후배들과 통 크게 하루에 전부 써버렸다. 부모님의 기대치를 한 번에 낮춰주는 착한 딸이 아닌가. 엄마가 방 청소 중 장학 증서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너무나 행복한 나날이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막내딸 때문에 우리 집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이십 춘기’를 지내는 2년 동안 졸업을 했고, 호텔리어로 취업도 했다. 부모님은 잊고 있었지만 난 은밀히 두 번째 협상에 맞춰 2년간의 계획을 세웠다. 취업 후에도 유학을 가고 싶다면 그때는 협조하겠다던 그 말을 난 철석같이 믿었다. 첫 번째 실패를 바탕으로 유학에 드는 비용을 계산했다. 취업 후 입사와 퇴사까지 두 번째 유학 계획을 세웠다. 목표가 있으니 호텔리어 일도 너무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관광업이 호황기라 대기업 초봉 월급의 딱 2배의 급여를 받았다. 계획대로 유학비용과 3개월의 생활비만큼 자금이 확보된 후 정확히 2년째 되던 해 퇴사를 결심했다. 상여금 포함 꽤 많은 급여를 받고 있던 터라 누구도 내가 퇴사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또 한 번의 유학 시도를 누구 하나 응원 해주는 사람은 없었고, 다들 제정신이냐는 말투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난 행복했다.
‘엄마 난 바다를 건널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