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마살 덕분에 글로벌 인재로 한창 성장하던 그때, 안도 산업 VIP 거래처였던 대만 유학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의 집에 불운이 닥쳐왔다. 친구 어머니가 병명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병원을 다녀도 병명을 알 수 없어 답답한 상황이 6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난 나고야에서 근무하면서 친구네 집안의 소식을 접하고 회사에도 알려 최후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친구 어머니의 병세가 7개월쯤 접어들었을 때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동경대학 병원에서 검사했는데 엄마가 암 이래. 1년을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대."
전화로도 전달되는 친구의 슬픔과 떨림 때문에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친구 나이 (치아키)만 21세 , 치아키 어머니 나이 50대 중반. 이제 아이들 다 키워놨으니 부부 동반으로 세계일주 할 거라고 기뻐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유학생인 나를 지극히도 아껴주었고, 집안의 대소사 초대는 물론, 때마다 가족 온천 여행에 나를 동행하곤 했다. 최상급 음식만을 대접받았다. 나도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힘든데 치아키의 슬픔이 어느 정도 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고야에서 동경으로 출장을 갈 때마다 1박을 하며 어머니 병실을 꼭 들리곤 했다. 어머니는 특실에 있었고 병실은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지냈다. 하지만 체격 좋던 어머니의 깡마른 몸과 초췌한 얼굴이 꽤 충격적이었다.
2007년 당시 암 치료약으로 제일 좋다는 항암제를 투여했고 그래서인지 신기하게도 머리도 안 빠지고 겉으로 보기에는 입맛이 없어 마른 것 외에는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항암치료로 인해 기운이 없어 앉아 있지도 누워 있지도 못하는 치아키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최상급 치료제를 사용했음에도 치아키 어머니는 그 후로 6개월 뒤 하늘의 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장례식장을 많이 가본 적이 없는 난 일본의 장례문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결혼식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초대를 받고 초대장에 참석 여부를 체크하여 보낸다. 인터넷 검색으로 처음 접하는 일본 장례 문화를 공부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치아키 어머니를 만나러 사쿠라이 상무님과 난 동경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도착한 장례식장은 고요하다 못해 시간이 멈춘 듯했다. 더할 나위 없는 밝은 미소 속 어머니의 영정 사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국과 너무 다른 일본 장례식은 고급스러운 금색 톤의 둥근 관이 영정 사진 앞에 놓여 있었다. 금색의 둥근 관 앞쪽에만 투명한 아크릴 소재로 되어 있고,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신부 화장을 한 것 같은 예쁜 얼굴을 하고 기모노를 입고 잠든 것 같은 치아키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향을 피우고 고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낯선 문화 충격으로 두려움으로 고인의 얼굴을 보니 이렇게도 예쁜 모습일 줄이야 상상 조차 하지 못했다 . 조문객을 맞이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치아키의 모습에 나 또한 눈물범벅이 되었다. 장례식 절차도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유가족이 손님 한분 한 분을 소개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한다. 마지막 순서로 치아키가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낭송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스물한 살의 치아키의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의 대한 깊은 감사를 전하는 경건하지만 무겁지 않은 장례식이었다. 마지막은 관을 가운데 자리로 이동하여 관을 열어 조문객 한 사람씩 고인에게 애도의 인사를 하고 꽃을 관 안에 넣고 상주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나를 가족석에 앉게 해 주어 발인까지 함께 했다. 이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애 첫 경험을 했다. 화장터로 이동하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와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화장을 진행한다. 상주와 조문객은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식사를 한다. 사시미 정식이 나왔던 것 같다. 난 목이 메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것은 치아키 외할머니가 생존해 계셨는데 본인의 딸이 지금 화장을 하고 있는데도 외할머니가 너무 식사를 잘하시는 것이다.
"お刺身もう一皿お願いします。(사시미 추가 부탁 드립니다)
사시미를 리필하셨다. 밥도 못 먹을 것 같은데 사시미 리필이라니 잘못 봤나 싶었다. 나만 너무 충격을 받았다. 문화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치아키를 포함하여 상주 모두 웃으면서 밥을 잘 먹었다. 속마음을 겉으로 들어내지 않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그때 상황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처음으로 일본 사람들이 너무 차갑고도 무섭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적잖은 충격에 정신이 몽롱해 있는 동안 화장이 끝났다는 방송이 나왔다.
난 가족만 입장할 수 있는 화장 했던 곳으로 같이 들어갔다. 가마 같은 곳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지런히 뼈가 놓여있었다. 직계 가족들이 양 옆으로 나란히 서서 긴 젓가락을 서로 맞대어 발부터 유골함에 넣었다. 일본은 뼈를 가루로 만들지 않고 발부터 차례대로 유골함에 넣고 유골함을 가지고 절이나 납골장에 보관한다. 집 안에도 고인을 기리는 불단을 설치하고 고인을 추모하며 참배를 한다.
치아키는 어머니가 장례가 끝나고 나에게 말했다.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
회사 생활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IT기업을 제외하고는 여성이 승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흘러 생각하기 어렵겠지만, 2007년 안도 산업이라는 중견기업에서는 여성 승진은 쉽지 않았다. 친구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승진 욕심도 있었던 난 한국에 귀국해야 하나, 이직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한국행을 선택했다. 10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있던 터라 한국행은 그 어떤 낯선 나라보다 두려웠다. 30대 중반에 금의환향은 아니었지만, 10년 동안 내 청춘의 열정과 추억을 하나씩 상자에 담으며, 눈물반 콧물반으로 굳은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일본과의 애절한 작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