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웰컴 투 코리아

by 서광


2008년 9월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가야 할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막막함을 위로하듯 관광비자 3개월까지 받고 퇴사 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세심하게 눈과 마음으로 일본을 담고 또 담았다. 일본 유학 때의 설렘과 기대와는 달리 내 나라로 돌아오는 길은 참 무겁고 막연하기만 했다. 나리타 공항에서 출발 전에 집에 연락을 했다. 저녁 준비한다고 공항버스 타고 오라고 하신다. 당황스러운 것은 마중을 안 나온 게 아니라, 우리 집이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전화상으로 수유역에 와서 택시 타고 00 아파트로 오라고 하신다.

"엄마, 이사를 했으면 마중 나와야지. 전화로 설명한다는 게 말이 돼?"

"손님도 아닌데 뭘 마중을 나가? 수유역에서 00 아파트로 가 달라고 해. 짐이 많아? " 하며 웃으신다.

엄마와 통화 후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택시를 타고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00 아파트 입구에서 전화를 하니 엄마가 서둘러 내려오셨다.

"잘 찾아왔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일본 가시나 다 되었네. 옷이 그게 뭐야? 짐이 많네. 왜 말 안 했어? 아파트 입구에서 엄마의 첫마디였다. " 밥 하느라 그랬어. 네가 된장찌개 먹고 싶다면서"

괜히 미안해서 인지 둘 다 크게 웃으며 집에 들어가니 그립던 엄마의 집밥 냄새가 한국에 왔음을 실감 나게 했다.

3평 남짓 작은 방이 내 방이라고 한다. 침대에 화장대 하나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일본에서 24평 아파트에서 마음껏 꾸미며 10년 동안 살던 내가 3평에서 지내야 했다. 좁디좁은 방이 너무 답답해서 뜬눈으로 첫날을 보냈다. 부모님과 언니 나 우리 네 식구는 각자의 영역에서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난 사사건건 한국 정서와는 맞지 않아 불평불만이 점점 커져만 갔다.

예를 들면 엄마가 노크도 없이 갑자기 방문을 열기, 식사 때 덜어 먹지 않고 숟가락으로 같이 먹기, 물어보지 않고 내 물건 정리하기,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 아저씨가 남은 거스름돈을 주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기, 지하철 타는데 사람들이 밀치고 지나가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기 등등

너무 많은 일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일본에서 살 때 당연시 여겼던 모든 것들이 한국에서는 내가 유난스러운 사람이 된 듯이 가족도 나를 불편해했다.

한국에 온 지 1달이 다 되어가도록 난 핸드폰도 만들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온통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유학 결정할 때도 나와 맞지 않는 한국 정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10년이란 공백 때문인지 텔레비전을 봐도 모르는 사람들뿐이었고, 초등학생이었던 사촌 동생들이 성인이 되어있었다. 친척들이 모여도 나를 어색해했고, 나도 어색한 환경 속에 그들의 모르는 대화 내용에 자연스레 말수도 적어졌고, 재미가 없었다. 내 방에서 일본 드라마와 노래만 들었고 일본 친구들하고 영상 채팅을 할 때만 웃음이 나왔다. 버티다 못해 2달에 한 번씩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한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만 겉도는 나에게 엄마는 화를 내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던가, 아니면 여기서 적응하던지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일본에 들어가면 영영 한국에 오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여권을 숨겨서 일본에 못 가게 하기도 했다. 재발급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엄마는 몰랐던 것이다. 때 아닌 인생 진로를 결정 못하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1년을 쉬었다.


1년 방황 끝에 한국에서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일본 회사 경력을 인정받아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건축 자재를 취급했던 일본 회사와 비슷한 무역회사에 입사하여 열심히 일을 했다. 무역회사라는 특성상 야근은 많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사장님 개인적인 일로 일본어 번역을 자주 시켰다. 회사 업무 외에 추가로 일본어 번역까지 하니 일이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추가 수당 없이 일본어 번역 업무를 해주었는데 점차 당연스럽게 번역 업무의 양이 증가했다.

"000 씨는 얼굴이 일본 사람 같아. 일본어 번역을 해주니 너무 편하네"

"잠깐 내 방으로 와봐. 퇴근하면 뭐 하나? 저녁에 미팅 있는데 같이 가는 거 어때? 지난번에 00 업체 00 팀장 알지? 일본 사람 뽑았냐고 하더라고 허허"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개인적인 업무를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내가 몰라서 그런가 싶어 주위에 물어보니 사장님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사장님 전 번역하려고 입사한 것 아닙니다. 외부업체 번역 비용 000입니다. 추가 수당으로 주세요. 더 이상은 무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주는 월급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거야. 추가 수당을 달라고?"

"제가 없었으면 업체에 맡겼을 테니 추가 수당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회사 생활 하는 동안 일본 업체도 연결해 줬고 한국 거래처와도 소통하여 매출이 꽤 많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일본과는 너무 다른 근무 환경에 힘들었을 때여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퇴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번 정도만 추가 수당을 받고 나서 두리뭉실하게 반복되는 번역 업무와 사장님의 잦은 개인적인 업무 권유로 더 이상 회사를 다니기 싫어졌다. 겨우 맘 잡고 첫 번째 입사한 곳이 일본을 더욱더 그리워하게 했다.

결국 퇴사를 하고 스케줄을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는 일본어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니 좋아하는 일본어를 마음껏 가르쳤다. 부모님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학생은 수업을 가르치지 않았고, 대학생, 회사원 위주로 일본어 수업을 자유로운 장소에서 가르치며 적응 못할 것 같던 한국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최대 인원 2~4명 정도로 수업을 했고, 서로 연인 되는 커플도 생겼다. 거래처에 이메일 쓰는 법, 이력서 원서 작성법, 실무 일본어를 열심히 재밌게 가르쳤다. 3년 정도 가르치다 보니 한국에도 중국어 열풍이 불어 일본어의 수요가 점차 줄어들었다. 다행히 일본에서 중국어 복수 전공한 덕분에 면세점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나의 변화무쌍한 생활은 한국에서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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