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림 그리고 계세요?

2025년 6월 18일의 기록.

by 정윤

오늘 숙소 앞바다에서 사생을 했다.


사생은 풍경과 경치를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그니까 나는


똑같이 그리기


를 한 것이다.


바로 몇 전의 글에서 ‘똑같이 그리기’가 제일 쉽고, 제일 처음 단계의 그림이라 생각하며 글을 썼으면서,

나는 다른 작업을 하길 바라면서, 똑같이 그냥 습관대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열심히 앞의 파도를 어떻게 하면 그림에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리다가,


문득


이 그림이 어떤 가치가 있나 생각했다.


당연히 보이는 것과 똑같이는 못 그리지만,

당연히 나의 시선으로 해석된 바다를 그리는 것이지만,

당연히 사진의 바다를 그리는 것과 사생을 하는 것은 그림의 결과가 다를 것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가 똑같이 그리기 위해 애썼다면, 그런 마음으로 그렸다면, 이게 다르건 말건 무슨 소용인가.


예술고등학교 동기들이 대학에서 같은 주제를 받고 너무 형이상학적인 작업을 하고,
뭔가의 똑같은 현상학적인 작업을 하고,
나는 그 작업이 싫다고 제주도에 왔으면서,


나는 아직 예고를 갓 졸업해 그냥 그림 그리는 것이 좋은 아무런 성장도 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유 주제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고 해도


나는 구상을 하지 못한다.


이미 내가 오늘 사용한 종이의 원래 목적이 이전에 자유 주제의 그림을 구상하다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미뤄 버려 남아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는 이상향이 너무 높아, 어떤 선도 긋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역 때 수능 성적 때문에 원하던 대학보다 낮은 대학을 준비하면서,

내가 그림을 좋아하는 가에 대해 의심했다.


내가 지금 이 전공(디자인)을 좋아하는지,

그냥 서울대가 좋았던 것은 아닌지,

그냥 내가 '잘'해서 좋았던 것은 아닌지,


작년에, 재작년에,

전공을 순수회화 계열로 바꾸면서,


내가 이 전공으로 바꾸고 싶은 것은 정말 이 전공이 하고 싶어서 일 텐데,
왜 서울대가 아니면 가고 싶지가 않은지에 대해 의심했다.
내가 그림이 좋고, 이 전공이 좋으면,
서울대가 아니어도 가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결국 대학을 보고 있는 건가?


사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중에서도


서울대, 홍대, 이대, 한예종,

물론 대다수가 이 라인업의 학교에 가긴 한다만,


이 정도의 학교만 좋은 학교라고, 다들 이 정도는 간다고 말하는 예고를 졸업했으니,

(우리끼리는 ‘예고 라이팅’이라고 부른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하진 않다.


다만,

나는 이러고 싶지 않았으니,

나는 ‘다른’ 작업을 하고 싶었으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꽤나 슬펐다.


다르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나는 다르다고 하고 싶었다.


결국 나도 같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다르다고 우기고 싶어서

제주대에 입학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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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림을 그린 것이긴 했다.


내가 그냥 통행 길에서 앉아 그림을 그리니까

종종 사람들이 와서 슬쩍 구경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나보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근데 나는 대답을 못했다.


‘작가’에 대해 나는 아직 정의를 못했다.


그렇다고 뭐 유명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당당히 보여줄 만한 작업을 하지도,

어느 기간정도 인정될 만한 그림 풍을 꾸준히 만들지도,

내 ‘작업’이라고 할 만한 그림을 그린 기간이 길지도,

하다 못해 작업을 잘 모아놓은 인스타 계정도,


어느 하나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근데


‘미대’ 생도 아니고,

내가 뭣도 아니었다.


결국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뭐 그림 그리고 있다고,

그냥 뭐 그렇다고 미대를 다니지는 않는다고,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결국에 이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게 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무엇을 그리고 있지.

나는 왜 제주도에 왔지.

나는 왜 제주대에 왔지.


2025년의 1학년 1학기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당차게 박차고 제주도에 온 나는,

무엇을 이루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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