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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얼리 Nov 11. 2023

DAY BY DAY : 봄

짝사랑은 너를 미워하는 일이지

봄의 일기는 그를 미워하게 된 마음이다.


■망상 : 그가 여자가 있다면

갑작스레 절망적이다. 맞아, 내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건 하경의 마음이 내게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 왜 이 가능성을 배제하고 소설을 써내려왔을까… 떠나보내야 하나. 그래,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다 거짓일 수도 있잖아. 그럼 나는 뭘 위해서 하루하루 노력하는 거지? 더 냉담해진다. 냉담해지고 싶다. 하경이 감감무소식이기 때문이다.

아냐, 마음 단단히 먹자고 결심하며 시작한 사랑이잖아. 그가 부담을 느낀 것 같으니 다시 친구부터 시작해볼까? 급할 거 없잖아. 일단 하경은 나를 친구라 생각하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오래 볼 명분은 있는 거니까 오랜 여정을 시작해볼 수 있지. 만나서도 친구처럼, 쿨하고 친근하게, 과하지 않게 잘 해봐야지! 나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 넌 더 빛나는 사람이 돼서 그 앞에 나타날 거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허튼 상상 말고 그를 만나기 위해 나를 다지는 데에 집중하자.


■디데이를 세다

석 달 하고 20일이 남았다. 이제 하경이 사무치게 보고 싶진 않다. 하경의 이야기만 가득하던 나는 이제 일 생각도 자주 한다. 그래도 그의 연락은 기다리고 있다. 먼저 연락하진 않겠지? 못됐다. 정말.

비행기를 예약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급하게 비행기를 끊다 15만 원을 날렸다. 너무 한심하다. 여전히 나는 6월만 기다린다. 술도 마시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다이어트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노력들이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휴가를 손꼽아 기다린 것도 처음이다. 그거 말곤 나를 설레게 하는 게 없다. 그를 만난 건 고작 나흘, 좋아한 건 3개월이지만 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다. 뉴욕에 가서 그를 만나 꼭 겨울에 함께 체코에 가자고 해야지.

뉴욕 가서 그를 만날 수는 있겠지? 그가 아예 다른 사람 같으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문득 두려운 거지. 기대한 만큼, 시간과 관심과 노력을 쏟은 만큼, 멋진 순간들이 펼쳐질 거라 믿고 싶은데 내 인생에서 기대한 것들, 이만큼 설렛던 것들은 다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았다. 실망하고 ‘역시나’했던 기억이 가득하니까.

뉴욕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견딜만 할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행복한 2주를 보낼까? 기대와 다른, 외롭고 쓸쓸하며 냉랭한 하경의 반응을 혼자 있는 시간도 적적한 그 기분을.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왜 그가 변덕스럽다 생각했지? 그는 한결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잘 내뱉지 않는다고 했고, 사랑이 뭔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가 나쁜 사람이 되면 내 마음은 편하겠으나 그는 사랑이 두려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에겐 상처를 주지만. 그는 연애를 원하지 않는다고 수차례 이야기했다. 나는 그걸 강요했고 어떤 역할을 기대했고 또 멋대로 실망했다. 그에게 부담을 주었다.


■이제는 자신을 보호해야 할 시간

내가 부족해서 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게 아니다. 나를 사랑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격미달이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나를 탓했지만,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게 맞다. 나도 그걸 알고 있다. 그는 강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었고 솔직하지 못했고 나를 밀어내기만 했다. 나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에게 분명 잘못이 있다. 있어야만 한다.

분명히 그와 나는 사랑의 패턴이 다르다. 그와는 사랑의 정의도 맞추기 힘들다. 사랑의 패턴이 다르면 사랑하기 어렵지. 그에게도 운명이었다면 다른 걸 뛰어넘을 정도였다면, 내 마음과 같았다면, 어떤 마음가짐이든 어떤 상태든 받아들였을 거다. 사랑은 움직이게 하니까. 즉, 내가 아닌 운명의 다른 누군가였으면 그는 달랐을 거다. 내가 운명이 아니었을 뿐.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보자. 하경을 이토록 사랑하는가, 아니면 하경을 사랑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하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FUCK YOU

일기를 안 쓴지 한 달이 지났구나. 나, 왜 이렇게 하경에 콩깍지가 쓰인 걸까. 그는 날 원하지도 않는데 난 어떻게 다시 말을 걸지 궁리하고, 오지 않을 연락만 기다리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게 뭔데? 하경의 사랑을 받으면 난 어떻게 되는데? 이제야 냉정한 판단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하경과 연애를 한다 쳐봐. 나에게 그닥 관심도 없어서 일상 공유도 안 할뿐더러 매번 내가 눈치보고 연락 기다리는 연애를 하고 싶어? 말이 잘 통하는 다른 이를 찾는 게 더 빠르고 행복하지 않아? 어차피 하경을 만질 수도 없어. 보기도 힘들고. 우린 미래가 없어. 이건 정말 내 짝사랑이 이어지지 못한 데서 오는 오기에 불과하지. 내가 왜 그가 추천해준 콘텐츠가 재미 없는데도 봐야 하고, 나를 잃어가며 반 년을 보내고 자책하고… 그의 곁에만 있으면 된다 생각하고 살았을까. 하경아. 너 진짜 후회할 거야. 나한테 사랑받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일 텐데. 내가 왜 너 때문에 자존감 깎이며 살았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단다. 알아서 동굴 안에서 잘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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