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베테랑이다. 서럽고 억울할 때마다 눌러왔던 눈물이 터져나온다. 만화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샘솟듯이, 말그대로 펑펑. 손등으로 볼을 연거푸 닦아내니 갑휴지를 건네주신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까지 운 적은 없었다. 내가 그린 내 인생 그래프, 바닥에 깔린 선 위로 툭,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때의 나를 떠올려 봐요. 무슨 생각이 들어요?" 불쌍해요. 다시 흐느끼며 울었다. "해주고 싶은 말 있어요?"
공주파에는 7명의 공주가 있다. 서열에 따라 원하는 공주를 택했는데, 난 끝순위였으므로 알라딘의 자스민이 되었다. 우린 어울려다니며 비행을 저질렀다. 깡시골의 공주파는 스스로 '우린 학교폭력을 하지 않는 건전한 일진'이라 평했다. 대신 술과 담배를 하며 일찍 어른이 되는 것뿐이라고 했다. 아, 따지자면 나는 1진은 아니고, 1.5진정도였겠다. 누가 공주파에 나를 끼워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안간힘으로 붙어있으려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오빠들이 한 봉지 가득 소주를 사왔다. 일회용 종이컵 한 줄짜리와 새우깡, 양파링, 그리고 소주 7병. 시골에서도 인적이 드문, 외진 동네의 폐가에 자리를 잡았다. 공주들의 품위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주말 대낮에 중학생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으니 딱이었다. 깨진 창문 파편을 오도독 밟으며 다 부서져 탁 트인 폐가 곳곳에 각자의 술상을 폈다. 나는 낡아빠진 괘종시계를 발로 쓰윽 밀고 콘크리트 바닥에 앉았다. 건배는 없다. 종이컵에 가득 소주를 따른 후 각자 마셨다. 한컵 가득 따른 술을 들이켰다.
벨이 몸을 옆으로 뉘였다. 술을 조절할 줄 모르니 그럴 만도 했다. 나도 한 컵을 마신 후 구역질이 나는 상태였다. 눈을 질끈 감고 한 컵, 그리고 헛구역질 한 번. 몇 번 반복하다보니 정말 구토를 할 것 같아 그만뒀다. 공주들과 오빠들은 모여서 술게임을 했다. 나는 함께할 수 없었기에,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술기운을 떨쳐보려 했다. 여기서 토해버리면 다신 못 낄 수도 있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술은 더럽게 맛이 없었지만 폐가에라도 이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았다.
몸을 뒤척이던 벨이 계단 아래로 '퍽' 떨어졌다. 마당 쪽에 자리를 잡은 바람에 집 밖으로 떨어진 거다. 꽤 단차가 있어 아플 만도 한데, 벨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가가서 벨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계속 잠만 잤다. 섬찟해진 나는 벨의 팔을 흔들었는데, 벨이 깨어나지 않았다. 집 안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린다. 다들 취한 상태였기에 웃음이 적절한 때를 모르고 마구 새어나왔다. 옆사람을 때리고 과자를 주워먹으며 숨 넘어갈 듯 웃었다. 그때 벨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쟤 이상해." 신데렐라 등 뒤에서 이야기했다. 신데렐라는 무응답으로 응답했다. 어떤 오빠가 더 이상형인지 고르는 중이었고, 오빠들은 태연한 척 고개를 치켜들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쟤 머리에 피 난다고." 내 말은 신데렐라의 선택 속에 묻혔다.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며 신데렐라와 이제 커플이 된 오빠를 향해 박수를 쳤다. 소주를 뿌리기도 했다. 축하해야 한다며 또 한 컵 가득 술을 따르는데, "아악!!!!" 애리얼이 벨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들 마당으로 달려가 벨을 내려다봤다. 볼이 발간 13명의 중학생들은 어떡해, 어떡해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떨면서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 오빠 한 명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머니 가게에서 훔친 술인데 들키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때 벨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 나는 벨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다. 벨이 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싫어해 마주치면 불같이 화를 내시는 분이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벨을 여기에 버리고 갈 순 없었다. 죽을 수도 있잖아.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설명해야 해? 그러는 사이 진동이 끊기고 또다시 울리기를 반복했다. 오빠들은 폐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공주들도 뒤를 따르려 채비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여보세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자 벨을 당장 바꾸라고 했다.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벨을 보며 죄책감이 치밀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단어가 진동했다. 벨의 아버지는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화를 낼 줄 알았던 그는 차분해졌다. 괜찮으니 위치만 말해달라고 나긋하게 이야기했다. 가장 가까운 식당 이름을 대고 전화를 끊었다. 신데렐라는 폐가를 떠나기 전 입술에 검지를 대며 "쉿!" 소리냈다. 너 절대 우리 얘기 하면 안 돼, 여기 너만 있었던 거다, 어?
벨의 아버지가 도착했다. 피가 흐르다 멎은, 지저분한 콘크리트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딸을 봤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차에 타라고만 했다. 벨을 뒷좌석에 싣고, 나는 조수석에 탔다. 손톱을 뜯었다. 오른손 엄지손톱으로 왼손 중지 손톱을 긁어댔다. 병원에 가서 술을 마시게 된 경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지, 부모님 귀에도 들어가려나, 불안했다. 그런데 벨의 아버지는 병원 대신 얕은 계곡으로 향했다. 벨을 안아들고 피가 난 머리를 씻겼다. "크게 다치진 않아서 괜찮을 거야."
벨에게선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써글년"이라 말하면서도 벨을 꼭 껴안으셨다. 벨의 아버지는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를 당부했다. "오늘 같이 있었던 그 애들, 다신 어울리지 마라."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짐작하셨던 거다. 그들과 멀리해야 할 이유는 찾을 수 있었지만, 모든 상황이 잘못된 걸 알았지만, 등 돌리는 방법을 몰랐다. 벨 아버지의 조언에 땅만 보고 눈을 꿈벅였다. 그 날 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벨은 집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고 했다. 저녁 즈음 공주들의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내 얘기 했어? 뭐라셔?
다음 타깃은 나의 집이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평일에 비어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양주를 좋아해 술 진열장이 있었고, 단독주택이라 시끄럽게 해도 문제가 안 되는 곳. 이번에도 오빠들이 빠지지 않았다. 지난 번 만행을 잘 넘겼는지 소주가 여러 병 담긴 봉지가 또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제안도, 허락도 한 적이 없는 술파티가 시작됐다. 가장 넓은 동생방 바닥에 자리를 폈다. 종이컵에 왈칵왈칵 소주를 부어 마시는데 지난번과 다르게 어쩐지 신나지는 않았다.
취기에 신데렐라가 한 오빠와 침대에서 방방 뛰었다. 싸구려 매트리스가 내려앉았다. "어머 어떡해." 내 방으로 옮겨 또 폴짝거렸다. 누군가는 진열장을 열어 맛도 모르는 양주를 꺼내 마셨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집안 곳곳에 있는 저금통을 찾아내 배를 갈랐다. 건들지 말라고 말리면 더 신나서 헤집고 다녔다. 모두가 즐거워보였다. 덕분에 잘 놀았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찢어진 저금통을 어떻게든 티 안나게 메워보려 했지만 금방 들통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당했다.
그들과 나는 친구일까? 신데렐라는 내게 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자랑으로 삼았다. 학년에서 가장 예쁘고 인기 있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하루는 2교시 시작 전, 옆반인 신데렐라가 찾아와 "나 할 말 있어, 너한테 너무 실망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수업이 끝나고 제대로 대화하자는 말에 40분 내내 지옥이었다. 신데렐라와 어제 나눈 문자를 다시보고, 오늘 했던 인사를 복기했다. 안절부절하며 찾아가면 신데렐라는 말했다. "힘들었지? 장난이었어. 네가 이렇게 걱정할 거 알고 한번 해봤는데…." 편한 친구이니까 이런 장난도 치는 거라며 자위해야 했다.
반 년 뒤, 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생 처음 장례식장을 향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벨은 상복을 입은 채 깊은 상심에 빠져있었다. 조문을 드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먼 발치서 고개 숙여 묵념하고 벨과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두꺼운 한숨을 내쉬며 운전했던, 벨의 아버지 모습이 아른거렸다. 다른 공주파 친구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힘이 돼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육개장 한 그릇을 먹은 후 조문객을 안내하고 신발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때 벨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엔 신데렐라가 있는 듯했다. "어, 여기 수아랑 지은이 있고… 기타 등등."
밤 11시쯤 신데렐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 말이 있으니 꽃집 옆 골목에서 만나자는 거였다. 마침 장례식장 구석에 있다 지쳐 사라질 참이었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11시 10분, 30분이 돼도 신데렐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나 문자도 받지 않았다. 골목에 주저앉아 생각했다. 또 장난일까? '기타 등등'을 골려주려는 생각이었던 걸까. 인적이 드물었고 주변에는 불이 켜진 가게도 없었다. 한기와 어둠, 나, 이렇게 셋만 남았다. 그리고 지나가던 검정 승용차 한 대.
조수석 창문을 훑으며 차가 오른쪽으로 향하는 걸 봤다. 그런데 곧바로 같은 차의 운전석이 보였다. 유턴을 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눈에 띄게, 느린 속도로 말이다. 운전석에서 브레이크를 밟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속도였다. 어...? 시야에서 사라진 차는 정확히 30초 뒤, 조수석 방향으로 다시 내 눈 앞으로 달려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고 나는 골목 안으로 죽을 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진입하기 힘든 골목이었다. 가장 안쪽에 다다르자 텃밭이 보였고, 키작은 나무 뒤에 숨었다. 검정 차는 '끼익' 소리를 내며 건너편 큰 도로로 달려왔다. 정차하더니 조수석과 뒷좌석에서 양복을 입은 성인 남성 두 명이 내렸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죽였다. 울 수도 없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나에게 까딱 큰 일이 날 것임이 분명했다. 남성들은 흩어졌고 무언가를―높은 확률로 나를― 찾았다. 쭈그려앉은 채 바스락 소리라도 낼라 잔뜩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나는 흙을 파기 시작했다. 공주파의 상징, 신발을 묻기 위해서였다. 한 켤레씩 다들 가지고 있기에 겨우 부모님을 졸라 산 로퍼였다. 달려올 때 딱딱 소리가 난 죄로 땅에 잠시 넣어둬야 했다. 차고 습기 찬 흙을 맨발로 밟았다. 얕게 판 구덩이에 신발을 넣고 다시 흙을 얹어 토닥였다. 내일 바로 가지러 올게. 더이상 남성들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나무에 가려 지나갈 수 있길 바랐다.
그때 신데렐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싸늘한 어둠 속 내 휴대폰은 별처럼 빛났고, 순간 검정 차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미친듯이 후진하기 시작했다. 맨발로 달렸다. 흙은 차갑고 축축했지만 아스팔트는 따가웠다. 아파트가 있는 쪽으로 힘껏 내달렸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앞만 보고 뛰었다. 목에서는 피 맛이 났다. 제발, 네? 살려주세요. 겨우 24시 해장국 가게가 보였고 검정 차는 사라졌다.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 뒤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바로 쓰러졌던가? 아주머니 앞에서 울었던가? 눈을 뜨니 흙투성이였던 맨발이 깨끗하게 씻겨져있었다.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 있었나 물었고 나는 그저 장례식장에 다녀왔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밖으로 데려가더니 굵은 소금을 내 몸에 뿌려댔다. 있는 힘껏 내게 소금을 쳤다. "귀신이 붙었나보다. 썩 꺼지라고 해야 해." 한바탕 소금을 맞고 집으로 갔다.
나는 로퍼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거창한 탈퇴 발표 없이 공주파에서 사라졌다. 매일 얼빠진 채 앉아있으니 처음에 나를 찾던 신데렐라도 그 뒤론 모른 채했다. 자스민은 없어도 되는 존재였으니까. 다만, 소금을 맞아 퇴치된 게 그들인지 나인지, 정답을 알 수 없어 괴로웠다. 혼자 밥 먹기가 싫어 어색한 반 아이들에 다가가 같이 먹자고 했다. 그들은 흔쾌히 허락했지만, 점심시간 내내 서로 눈치만 봤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홀로 학교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골랐다. 영화 필름처럼 하나씩 꺼내 재생시켜보고, 무리 속에 있던 나를, 그리고 벗어난 나를 지금의 내 눈앞에 세워보았다. 작고 여리고, 무엇보다 친구가 필요했던 자스민이 서있다. 제가 저에게, 어렸던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뒷말은 이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