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대하여-콤플렉스가 '돈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부자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최한별. 28세.
주말 늦은 오후 강남역 근처 편의점 앞에서 그를 만났다. 평소와 다른 멀끔한 차림에 클러치를 들었다.
"나 회사에서랑 확실히 다르지?"
똑같다고 대답하니 서운해했다. 오히려 꾸민 모습이 웃겨서 깔깔대며 웃었다.
"야, 그래도 내가 비비도 바르고! 어?"
그래봤자 너는 최한별이라고 놀렸다. 지금까지 보던 모습과 다르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펄쩍 뛰는 그의 반응이 재미있으므로.
편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회사에서 만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을 때 그를 알게 됐다. 가끔 술 마시고 통화하며 그의 삶의 퍼즐 몇 조각을 알게 됐는데 다른 조각들도 궁금해졌다. 내가 궁금해 그를 불러냈으면서도 내 일정에 맞추라며 이기적으로 밀어부쳤지만 그는 화도 내지 않는다. 툴툴거리긴 누구보다 툴툴거리지만.
그는 회사 동료인 영상취재기자다. 나이는 나보다 2살 많지만 나는 그를 '한별아'라고 부른다. 그는 그런 나의 호칭, 태도, 말투를 모두 편하게 받아들이고 '네가 그렇게 해준 덕분에 나도 네가 너무 편하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서로 "나는 네가 만만해"라고 과격한 농담을 하지만 둘이 잘 맞고 서로가 필요하다는 건 잘 안다. 닮은 구석이 많다는 점도 수시로 느꼈다. 특히 겉으로 매우 밝고 외향적이라는 점이 비슷했다.
#밝다 #수다스럽다 #짓꿏다
취재 현장에 나가며 한별을 처음 만났다. 간단한 촬영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었고 이동 시간이 길어 차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 그가 먼저 질문했다. 어디 사는지, 오늘 인터뷰는 어떤 방향으로 하는 게 좋을지,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직업상 어딜가도 질문을 생각하고 던져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묻는 게 어색했다. 그러면서도 즐거웠다. 1시간을 가는데 지루하지가 않았다. 이 사람 참 붙임성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현장에서 그가 고생을 많이 했다. 나보다 선배인 티가 났다. 이리저리 뛰며 힘든 내색도 하지 않았고 '이렇게 찍어보는 건 어떨까요?' 아이디어도 풍성하게 내줬다. 취재 일정을 마치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며 "고생했어요. 우리 말 놓을까?"라는 제안을 시작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돌아가는 길 내가 먼저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며 장난을 쳤다. 보통 웃어넘기며 재미있어하는 반응인데, 그는 보통이 아니더라. "이러기냐"며 복수를 다짐했다. 알고보니 나만큼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카페에 들어갔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에게 오늘 마이크를 내어줬다. 오늘만은 내가 질문하고 그가 온전히 대답했다.
-녹음 좀 할게.
"여기다 대고 말하면 돼? (휴대폰을 입 바로 앞에 대더니 아주아주 느끼하게) 내가 이렇게 할게. 내 이름은 별이라고 해."
-응. 너무 싫다, 한별아. 그냥 시작할게. 내가 볼 땐 너는 항상 솔직하고, 자기 이야기 잘 하고. 나 말고 네 친구들이 보는 너는 어때?
"철 없는 놈. 맨날 깝죽대고. 친구들이랑 있을 때 그냥 눈만 마주쳐도 '뭘 봐, 새끼야' 이런단 말이야."
-성격 문제 있는 거 아냐? (웃음)
"그래도 그건 있지. 내가 술을 안 마시니까. 진짜 고마운 게 내가정말 힘들었을 때 '술 먹자' 하니까 동네 친구들이 다 나오니까. 시간 지나고 뭐 하다 보니까 애들이 잘 못 만나. 그래서 오랜만에 봤는데도 좋았지."
-너 자체가 일단 밝아서 사람을 기분 좋게 하지.
"밝은 척 하는 거지."
-어, 맞아.
"내가 인생이 스펙타클하잖아. 내 또래 중에 나만큼 스펙타클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밝고 장난끼가 많았다면 그를 첫 번째 인터뷰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거다. 그는 늘 햇살과 닮은 웃음을 짓지만 자주 씁쓸하게 웃는다. 오늘도 후자를 많이 봤다.
#돈에의집착 #가정사 #코인
한별은 동네에서 부잣집 아들로 유명했다. 아버지는 호텔 사장 출신의 사업가였고 취미는 미국으로 원정 골프를 치러 다니는 거였다. 1년에 한 번, 혹은 6개월에 한 번 차를 바꾸기도 했다. '회장님 아들' 소리를 들으며 자란 거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깨를 으쓱해보이기도 했지만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반전의 접속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돈 정말 많았나보구나.
"정말 금수저였어, 어떻게 보면. 부모님이 돈도 많고 인맥도 넓었고.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많았지. 그래도 우리 집에 돈이 제일 많았어. 근데 지금은 아니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내가 고등학생 때 70억, 80억 부도가 났어. 나도 자세히는 몰라. 집이 경매로 넘어가기도 하고 일 관련해서 아빠가 구치소로 들어가셨고. 엄청 힘들었어 그 때. 집이 무너지고 아파트 빼앗기고 이런 걸 다 봤어. 사정이 안 좋으니까 내가 대출받기도 했고 중학교 때부터 모았던 적금도 다 깨고, 친구들한테 몇 백만 원씩 돈 빌리기도 했고. 합하면 천만 원 넘을 거야. 엄청 쪽팔렸어."
-아이고. 너 너무 힘들었겠다.
"아빠가 정말 인맥이 좋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아빠가 망했을 때 안 도와주더라고. 차라리 어렸을 때 부자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드는 거야. 많이 누려본 게 있으니까 다시 그렇게 되고 싶지."
-그래서 코인을 시작한 건가?
"로또도 사고 코인도 사고 하는데. 아파트는 내가 월급 받아서 마련을 못하니까. 대출 받아서 주식 사고 주식했던 돈으로 이제 코인하고 있어. 근데 느끼는 건 있지. 그 대출금을 다 갚으면 31살이 되는데 진짜 돈을 모으는 건 그때부터인 거잖아. 그게 짜증나는 거야."
그는 올해 초 주식 계좌에 있던 투자금을 모두 인출해 암호화폐로 갈아탔다. 내가 처음 듣는 온갖 종류의 코인을 가지고 있다. 사실 사정을 알기 전, 코인 시장 침체에 속상해하는 그를 보며 쉽게 "그만 좀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간절함이나 노력 없이 일확천금만 노린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에게는 코인이 예전에 누리던 걸 복구해줄 유일한 통로였다.
-그래서 코인하는 건지 몰랐지.
"난 우리 엄마아빠처럼 되기 싫어. 부도 나고 나서 엄마아빠가 자주 싸웠거든? 난 돈 많이 벌면 가족들 안 보려고."
-굳이 그렇게까지?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아. 진절머리가 나, 진짜로. 돈 때문에 싸우는 걸 보면서 스트레스 받고. 나는 내 자식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기 싫고, 내가 예전에 누렸던 걸 미래의 내 가족한테 누리게 해주고 싶어. 근데 내가 나이가 먹을 수록 현실을 깨닫게 되잖아. 그럴수록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 거지."
얼마나 고통이었으면 가족과의 연을 끊으려 할까 짐작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을 인터뷰 내내 열 번 넘게 한 것 같다.
-그런 게 네 콤플렉스가 됐나?
"그치. 내 사정들, 집안 사정. 돈. 그치."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힘든 가정사를 말하면서도 힘듦을 꾹꾹 눌러담는 것 같지 않았다. 태연하게, 여러 번 타인에게 공유해본 것처럼 보였다. 나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가정사나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 '숨겨야 하는 이야기'에 넣어두고 다른 사람에게 열어놓지 않는다. 거리낌 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니 '참 자신감 있는 친구구나' 싶었다.
-반대로 네 자랑거리는 뭐야?
"외모?"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내가 원래 엄청 뚱뚱했어. 지금은 사람들이 잘생겼다 하니까 어디 가서 못나지는 않았구나 이 생각은 하는 거지. 키가 아쉽긴 한데. 내가 키만 컸으면 인기 진짜 많았을 것 같아."
-어휴.
"왜~ 맞잖아."
잘생긴 건 맞는데 한별의 입에서 저 얘기가 나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어지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셀프칭찬을 외면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들이켰다.
"담배 하나 피우러 갈까?"
굿 타이밍.
골목길에 들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궐련형 전자담배를, 나는 보헴을 피운다. 한별은 신나보였다. 역시 수다쟁이다. 담배를 피우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그가 말했다.
"담배도 끊어야 하는데. 여자친구 생기면 바로 끊을 거야."
틈만 나면 회사에서 '담배ㄱ?'라고 메시지를 보내면서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물었다.
"그냥. 대부분 안 좋아하니까. 몸에도 안 좋고. 근데 언제 소개해줄 거야?"
한별의 올해 목표는 나에게서 좋은 사람을 소개받는 거다.
다음 편은 연애 이야기지만 또 돈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