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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얼리 Apr 27. 2022

침묵을 깼다

그보다 숨 막히는 건 내버려둔 채

책상에 놓인 생수병 중 하나를 집었다. 어색함을 삼키듯 물을 꼴깍 넘겼다. 맞은편에 앉은 변호사 또또 씨도, 그 옆에 앉은 기업인 거울 씨도 볼펜만 만지작거렸다.


“다들 퇴근길이 많이 막혔죠?”


“네. 힘들더라고요.”


“...”


침묵을 깨려는 1차 시도, 실패. 교수 뚜껑 씨는 우리가 모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 수업은 대학 전4장입니다. 자료 먼저 읽고 계시면 되겠네요.”


자료나 읽어야지 옳다구나 했는데... 종이에는 한자만 빼곡하다. 이름을 아는 알 지(知) 자와 갈 지(之) 자, 그리고 나머지 검정색 잉크만이 흩날렸다. 무얼 알지도 못하고 갈 곳도 잃은 눈은 또또 씨에게 머물렀다. 또또 씨도 이해 못하긴 마찬가지인가보다. 그는 변호사의 틀에 맞는 복장을 했지만 양복에 빳빳함은 없고 가장 윗 단추는 풀어져 있다. 그렇다고 한껏 풀린 질문이 올 줄은 몰랐지.


“남자친구 있으세요?”


아, 이것이 2차 시도구나.


“네, 있어요. 1년 반 정도 됐어요.”


“아… 좋을 때네요.”


그때 거울 씨가 대뜸 한 여자 사진을 들이밀었다.


“그럼 이 친구 좀 소개해줄 남자 주변에 없어요?”


“네?”     


“서른셋이고 회계사인데 ‘사’자 들어간 직업 남자 좀 붙여주려고요.”


“누구신데요?”


“제 친구 딸이요. 근데 어렵겠죠, 아무래도? 얼굴이 그닥…. 친구는 예쁘다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디 한 번 보자’며 심사위원 또또 씨와 뚜껑 씨가 나섰다. 친구의 딸, 딸의 친구일 그 여성을 보고 동시에 눈살을 찌푸린다.


“예쁘신데요, 뭘…. 찾아볼게요!”


도저히 침묵이 깨지질 않는다. 수업이라도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도착하지 않은 한 사람을 기다려야만 한다. 고요함과 불쾌함이 코를 찔렀다.


또또 씨의 재시도.


“근데 소개해주지 마세요. 내가 얼마 전에 아는 분한테 남자 애 하나 소개해줬는데, 곧 결혼할 거라고 같이 미국 가더니 여자가 도망 나오더라고.”


“왜요?”


“흠씬 두들겨 맞았대. 한국 오기 전에 1년 동안 그랬다던데. 너무 두들겨 맞아서 온몸에 멍이었다더라고.” 


“아이고…”


모두 안타까움을 뱉었다. 말할 거리가 생겼다. 취재 차 만났던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떠올랐다. 교진 씨는 매일 같이 남편이 던진 물건들을 쓸어 담으며 살았고, 지연 씨는 넘어져 다친 걸로 보이도록 위장해 병원에서 머리를 꿰맸다. 미성 씨는 베란다를 통해 옆집으로 대피하면서까지 112 신고를 했지만 “부부끼리 대화가 부족하다”는 출동 경찰관의 말에,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아이와 쉼터에 들어갔다.


이들의 이야기는 기사화되지 않았다. “극적인 사연이 없다”, “영상이 없다”는 뻔한 이유였다. 또또 씨라면 가정폭력이 반복되는 법적 허점에 대해 조언해주지 않을까. 거울 씨라면 기업이 피해자를 지원하는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해줄 것만 같다. 뚜껑 씨로부터는 이들 이야기를 풀어갈 혜안을 얻을 수 있겠는데! 더 쭈뼛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힘입어 판타지를 그려보았다.


“에이, 근데 요즘은 여자들도 때려요.”


“맞다, 맞다. 그렇다더라고. 가정폭력의 80% 가해자가 남자라는데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20%는 여자라는 거예요. 여자들도 많이 때린다니까.”


“아이고. 무섭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에요. 아니,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힘이 약해서 맞고 있겠어요? 그게 진짜 폭력이죠.”


“네...?”


상상치 못한 전개. 뚜껑 씨가 제시한 통계가 틀린 건 아니다. 지난 2015년부터 2018년 6월까지 경찰이 집계한 가정폭력 피해자는 75.3%가 여성, 24.7%가 남성이었다. 그런데 ‘진짜 폭력’은 뭘까? 여성들이 맞는 건 힘의 불균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맞는 ‘가짜 폭력’인 걸까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봐요. 여자가 아무리 덩치가 크고 남자가 왜소해도 힘으로 겨루면 남자가 이긴다니까? 그런데 남자가 맞고 있다는 거야.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냐고. 자연의 섭리에 안 맞잖아요.”


“그렇지. 힘이 딸리는 건, 딸리는데 어떡해. 맞아야지.”


“허허허. 여자 잘 만나야 돼.”


“남자들이 진짜 불쌍해요, 요즘은.”


아버지 연배의 또또, 거울, 뚜껑 – 그러니까 변호사, 기업인, 교수는 떠들썩하게 ‘동성’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늘어놓았다. 섬찟했다. 공간을 짓눌렀던 고요의 무게와는 비교도 안 될, 그보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숨이 막히는 위협이었다. 생수통의 울룩불룩한 표면을 손톱으로 긁었다. 드르륵. 한 마음이 된 셋이 말을 멈추고 집중했다.


“전 세계에서 여자들이 가정폭력으로 하루 평균….”


얇디얇게 말이 새어나왔다.


“많이 늦었죠! 죄송합니다.”


지각생이 도착했다. 137명이 죽는다는 사실은 미처 전달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슨 대답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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