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목 아프다 해서 약사 먹였는데 밤 열 시, 새벽 네시 열이 오른다. 아무래도 촉이 안 좋아 일찍이 병원을 다시 갔고 이래저래 독감검사를 해보고 싶다 하니 선생님도 권하시더라. 삼분도 안 돼서 아이고~ 민서가 A형 독감이네 하시며 키트를 보여주시는데 가슴이 덜컥. 찬이 아빠도 기침 나서 혹시나 검사했는데 다행히 아니라네.
둘이 약 타고 과일이랑 간식 좀 사서 집에 왔는데 계속 힘들어하고 먹는 거 족족 토하고 쓰러지듯 기운을 못 차리네. 타미 부작용 같기도 하나 음식을 먹지 못해서 다시 병원으로 갔다. 2년 전 민서가 A형 독감일 때도 바로 열오를 때 수액 맞고 하니 금방 나은 거 같아서 수액하나 맞고 왔다. 약간의 탈 수도 있어서 맞히고 나니 훨씬 상태가 호전돼서 간식도 먹고 저녁약도 잘 먹고 쓰러지듯 자고 있다. 서영이도 가래가 약간 끼는데 열은 없어서 다행이긴 하고 남편은 아직 방학이라 진짜 다행이기도 하고.
하필 딱 개학이라 같이 있어주지도 못하고.
미안하다.
수액 맞으러 나가는 길에 너무 힘들어해서 업고 가는데 이제는 너무 많이 커서 업으니 내 두 손이 맞닿지도 않고 무거워 허리도 아프고 디리도 길어서 삐져나온다. 그래도 어미라고 딱 붙어서 아기처럼 편안해하는 걸 보니 요 녀석이 엄마한테 오롯이 이렇게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어 아프나. 그동안 이 녀석도 엄마품에 이리 안겨있고 싶었을 텐데 둘째라고 동생한테 밀려서 충분히 사랑을 다 못 줬던 거 같고 한없이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아픈 거 보니 안쓰럽고 애잔하고 짠하고.
초등입학 전에 꼭 하루 시간 내서 우리 민서랑만 손잡고 놀러 나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픈 걸로 둘이 나가는 게 어찌나 맘이 안타깝던지. 돌아오는 길에 사달라던 호두빵 차가 가고 없어서 다행히 파파호두 있어 두 봉지 사줬다. 민서가 건드린 한 봉지 다 먹으라고 주니 한없이 철없는 오빠는
아프니까 좋겠다~ 한 봉지 다 하고.
이러고 있고. 에이그. 철 좀 들어라 오빠야.
괜스레 나는 종일 병원만 세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잠이 안 온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잠이 또 조금 달아났나 보다. 피곤해서 자고 싶다는 느낌을 잃은 지 오래. 오늘도 자다가 몇 번은 깨겠지만. 행여나 모르니 열 오르나 봐야 하니까. 한방살이라 격리 아닌 격리로 혼자 침대에서 절대 못 내려오게 하니 소리도 없이 거기서 꼼짝 안 하고 혼자 이불 덮고 자고 있는 걸 보니 괜히 눈물만 나네. 낼 개학이라 일찍 자야 되는데.
잠이 또 저만지 가버렸다.
내가 다시 엄마가 된다면
새 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집이 일찍 팔려서 3달가량 친정에서 더부살이하던 때가 있었다. 시골집 주택은 외풍도 심하고 찬바람도 다 들이닥쳐 한 겨울 꼬마들의 시골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작은 집이라도 따뜻한 아파트 살다가 방 한 칸에 다섯이 다 들어가 침대하나 두고 사는 삶이란. 부엌도 밖에 있고 화장실도 밖으로 나가야 하는 불편한 집이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혼자 계신 아버지 따뜻한 밥 한 번 해드릴까 싶어 덜컥 들어가 살던 때였다. 개학을 앞둔 어느 날 독감에 걸려버린 둘째를 데리고 병원진료 다니던 어느 날의 일기였나 보다.
싸늘한 겨울바람에 어디선가 아랫목 불 때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집집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런 시골마을에서 석 달은 우리에게도 즐거운 추억이었다. 한 방에 뒤엉켜서 살아가면서 자유공간이나 여유조차 없이 살던 그때는 마치 오늘 같이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던 날이었던 것 같다.
딸 셋에 둘째로 살면서 나는 언니와 동생에게 차별을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잘했던 언니는 항상 부모님의 기대주였고 몸이 약한 동생은 항상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 가운데서 알아서 생존하고 있는 별 탈없이 착하게 커주는 내가 부모님께는 쉬운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왔던 지난날이 후회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효녀심청 콤플렉스를 스스로 만들며 살아왔던 것 같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동생이 임신을 했다. 두어 달 간격으로 결혼 날짜를 잡았다. 오롯이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독립하고 싶던 순간, 또 동생과 그 관심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동생 상견례 나가는 엄마 앞에서 제대로 심술을 부렸다. 엄마는 네 동생인데 뭐가 그리 억울하냐며 또 나를 나무라셨다. 그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참을 걸 그랬다. 그래서 나는 셋을 낳을 생각도 없었지만 막내가 생기는 순간 제일 먼저 둘째를 외롭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 나를 제일 빼닮아 나온 것이 둘째였다. 너무나 착하고 순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가끔은 잃게 만든다. 막내를 보며 웃어줄 때에도 혹시나 둘째가 나를 보고 있지나 않을까 고개 돌리며 미소를 지워야 했다. 둘째가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날처럼 많이 아플 때에는 내가 못 해준 게 많아서 그런가 맘 한 구석이 아릴 때가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나도 엄마 연차가 늘어나다 보니 자식을 두고 차별이란 있을 수가 없더라. 아마 우리 엄마도 표현방식의 차이였을 뿐인데 마음이 꽁했던 내가 차별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만 바라봐주길 바라는 욕심에 섭섭해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내가 잘 보이려고 애썼던 거면서. 어느 하나 자식은 좋고 나쁨이 없더라. 단지 아이들의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주다 보면 서로 다르게 대해 줄 수밖에 없고 다른 기질의 아이가 보기에는 엄마가 나만 차별한다 생각하게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어릴 때 철없던 나도 그랬음을 이제야 알겠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조상님들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다. 적어도 엄마에게는 손가락 열 개 모두 아픈 손가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