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경, 천개의 바람
책 표지에는 멋쟁이 아저씨인데 책 장을 돌려 제일 뒷 면을 펴면 아저씨는 아주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아저씨는 모발기증을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남자가 머리를 기른다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요. 알고 보면 참 멋진 아저씨인데 말이죠. 저는 어린 시절 긴 머리카락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이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였어요. 어릴 때부터 짧은 머리카락으로 살았기에 간혹 남자아이냐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항상 제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주셨습니다. 싫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머리카락을 길러보고 싶다고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라고 싶기도 하지만 아마 내 머리카락이 짧아서 어머니가 편했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인이 되고도 긴 머리를 자주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짧은 커트머리로 살다가 긴 머리카락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머리를 감는 것도 묶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아기를 낳고 나니 더 그랬습니다. 밤낮없이 수유하고 아이를 돌보는데 긴 머리는 사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혈병 어린이를 위해 머리카락을 기부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백혈병 어린이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내가 정말 관심 없는 머리카락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니! 고민이 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나 싶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았습니다.
모발기부는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잘라놓은 머리카락이 25센티 이상이 되어야 하고 염색을 한 머리카락은 쓸 수 없습니다. 임신과 수유로 염색은 그 당시 하지 않았기에 괜찮은데 25센티의 머리카락을 참고 기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오로지 기부라는 목적 하나로 꾹 참았습니다. 그렇게 2년이 되어갈 즘 25센티가 넘는 머리카락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백혈병 단체에 기부를 했고 며칠 뒤 기부증서를 받았습니다. 나의 인내심을 인정받은 것 같아 좋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저는 지병이 있는 남편에게 신장 한쪽을 공여했습니다. 하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나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후회 없이 살았다는 생각에 그리 아깝지 않았습니다. 일 년쯤 지난 후엔 장기기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 깨어날 수 없는 뇌사상태가 되어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몸이 된다면 내 몸에 무엇을 내어 준 들 내가 어찌 알겠는가 싶더군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장기기증 홈페이지에서 마지막 완료 단추를 누르는데 한 3분쯤 고민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기증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니 후회 없이 버튼을 누를 수 있었습니다. 장기기증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버튼 하나면 가능하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중에 살 만큼 다 살아서 나눠줄 건강한 장기가 없을 수도 있고 기증이 안 되는 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만에 하나 내 장기가 쓰일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때를 생각해서 기증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울지 말고 미련 없이 기증하라고 이야기했답니다.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이 아니겠습니까.
나눔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많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만 덜어주면 됩니다. 나에게 조금이 누군가에게는 엄청 큰 것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작은 것이 모이면 큰 것이 된다고 알고 있잖아요. 열심히 일하고 일한 만큼 번 돈을 가치 있게 쓰면 됩니다. 내가 열심히 살고 떠날 때 후회 없으면 됩니다. 그러면 나누는 것이 조금 덜 아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