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었습니다 - 지식의 쇠퇴

오마에 겐이치 - 지식의 쇠퇴(2009)

by 덴유

이 책이 뛰어난 것은 2009년에 이미 2025년 현대까지 이어지는 트랜드를 읽어냈다는 것이다. 지식계층의 변화, 교양의 변화를 겐이치는 이미 2009년에 알고 있었고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100% 수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애초에 일본의 발전을 위해 적힌 책이다. 글로벌 리더로서 ‘일본’을 만들기 위한 책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책을 읽어야한다. 일본 특유의 민족주의적 시각이 포함되어 있고, 계몽을 바탕으로 하기에 지식인으로써 자신의 프라이드가 잔뜩 담긴 책이다. 이에 덧붙여서 ‘현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결국 무한한 경제 성장을 기초로 하고 있기에 비판적 경제학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조금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다. 이 책에서 겐이치가 말하는 것은 “무한한 경제 성장을 전제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영어로 된 미디어’를 통해 it와 파이낸셜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 감각을 익히고 발전을 위해 과감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진 즉 고지능자가 많아진 사회가 결국 ‘글로벌 리더’국가가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그는 2009년의 일본이 가진 문제들의 발현점을 ‘정치’로 잡는다. 일본의 정치 상황이 1~2년에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그 변화의 요지가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한 과한 집착’이라는 것을 겐이치는 비판한다. 즉 시민들의 핵심을 보지 않고 보여지는 단순한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태도가 일본의 정치를 부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민 태도의 근본적 원인을 겐이치는 크게 두가지로 분류한다. 첫번째는 ‘욕망 없음’ 즉 소소한 행복이다. 사소한 ‘이익’에 만족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는 ‘야망’이 가진 추진성에 긍정한다. 두번째는 교육이다. 겐이치는 실제로 관료와의 대화에서 관료가 했던 말을 적었다. “겐이치씨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민화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것이 정말 한 국가의 관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겐이치는 일본의 교육을 시민 우민화의 가장 큰 중추라고 이야기하면서 유토리 교육(유도리 교육)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한다. 이후 2011년도에 일본은 유토리 교육을 전면 폐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교육이 더 발전된 것은 아니다. 일본의 교육은 회귀했다.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이다. 겐이치는 분명 이런 상황을 경계했다. 그는 일본이 가진 자국 중심적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언어를 통한 시야의 확장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면서, ‘영어로 된 정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미 2009년에 it지식이 새로운 교양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겐이치는 결국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것은 집단의 IQ라고 이야기한다. 집단의 아이큐를 높이기 위해선 개개인이 ‘계몽’되어야한다. 겐이치가 말하는 계몽은 앞서 말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감하고, 핵심을 읽고, 미래를 예측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많은 공동체가 ‘글로벌 리더’라고 말한다. 겐이치가 원하는 교육의 발전과 야망은 모두 집단의 IQ를 높이기 위한 초석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나 또한 한국에 초점을 맞추어서 읽게 되었다. 2009년의 일본의 상황을 현대의 한국에 대입하고, 겐이치의 ‘조언’을 현대 한국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나는 2009년의 일본의 상황과 지금의 한국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나는 겐이치가 말하는 B층(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인기와 분위기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한국에 다수라고 생각한다. 겐이치는 이들을 ‘계몽’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겐이치가 말하는 계몽은 너무나도 국가주의적이면서 개인주의적이다. 뛰어난 개인이 다수 모여 국가를 부흥시키는 그림이 겐이치의 머릿속에는 그려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자주 보이지 않았던가? 어떤 분야가 성공해서 해외에서 인정을 받으면 K- 가 붙는다. 그들의 성공은 국가의 성공으로 비춰지고 이에 부정하면 그들은 배신자가 된다. 우리는 미국을 보면서 소수가 다수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k- 현상을 보았을 때 사실 한국을 먹여 살리는 것도 소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두 다 그러하다. 아니 사실 자본주의는 그러한 비대칭적 구조를 필연적으로 만들어내고, 마치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 고귀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포장하면서 그들이 가져가는 과한 자본에 대해 눈감아준다. 겐이치의 논리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글로벌 자본주의를 외치면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이면은 도외시하고, 계몽을 외치면서 그럼에도 남아있을 B층에 대한 관용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 그의 논의에서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위한 관용은 남아있지 않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B층은 정말 생각없이 분위기에 휩쓸리기만 하는 사람인가?


겐이치의 논의는 마치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중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음악을 생각없이 즐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선호하고 좋아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비롯된 것인지 혹은 자신의 자아를 타인에게 의탁해서 나타난 것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인디음악을 좋아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 ‘힙’하다고 이야기하길래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B층과 다르지 않다. 나의 선택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것을 계몽이라고 한다면 계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계몽은 단순히 자본주의 파이낸셜, 영어, it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다. 누군가 열심히 파이낸셜과 영어, it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자. 누군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이걸 왜 공부하세요?” 만약 이 질문에 “겐이치씨가 이렇게 해야 고지능자가 되어서 글로벌 리더가 된다던데요?”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과 B층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물론 그가 변화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모든 이유는 자신에게 달려있어야 한다.


다시 겐이치의 문장에는 ‘관용’이 없다는 논의로 돌아가보자. 자유(自由)는 스스로의 이유를 의미한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분명 ‘나’는 ‘자유’해야 한다. 이때의 ‘자유’와 ‘관용’, 이 두단어의 거리는 멀지 않다. 자유에는 자연스럽게 책임과 존중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자유는 배제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내가 자유하다면 누군가 인디음악을 듣던 힙합을 듣던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타인의 일부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유는 관용한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자유는 환대한다. 데리다의 완전한 환대는 사회 안에 그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유는 그 사회 안에서 충분히 존중 받아야한다. 그것이 그 사람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의 ‘인정’이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따라가는 B층에게 중요한 것은 파이낸셜, it가 아닌 자유다. 그 자유를 막는 구조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과제다. 이 인과의 실 중 하나는 명확하게 나왔다. 이미 관료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우민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우리 함께 자유하자! 나의 이유를 찾자.


겐이치의 문장은 한마디로 ‘명확’하다. 마치 정답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이 책은 비판적 시선으로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문장이 하나 있다. “이익과 성공을 착각하지 말라.” 우리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여 더불어 나가는 것을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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