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가족 3.0을 보고
대부분의 문화(음악, 미술, 공연, 연극, 뮤지컬. 등등 모든 것)는 실제의 재현이다. 재현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우리는 파이프 그림을 보면 그것을 파이프라고 '인식'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파이프 그림을 보고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파이프 그 자체라고 감각하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정의함으로써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닌 그저 '파이프 그림' 즉 재현임을 역설한다.
보통의 예술•문화는 정형화된 재현을 통해 정형화된 상징을 전달하고 수용자는 상징을 익숙한 방식으로 수용, 해석 한다. 재현 수용 및 해석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낯선 감각은 필요하지 않다. 석양을 보며 느끼는 아련한 감각, 장미가 의미하는 사랑과 정열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감각된다. 이 글에서는 이런 정형화된 재현체계를 '클래식'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클래식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스투디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스투디움은 다수가 재현의 의미를 익숙하게 받아드리는 일반화된 코드다. 쉽게 말해 '정답'이 존재한다. 앞서 이야기한 석양과 장미의 의미를 우리가 쉽게 파악하는 것은 스투디움이 관습적으로 우리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투디움을 잘 활용한 클래식은 수작, 걸작을 위한 밑 바탕이다.
이런 스투디움과 클래식은 분명 '웰 메이드'의 기본이지만 반대로 말한다면 익숙한 감각의 반복이다. 익숙하기에 클래식이 주는 감각은 무딘 감각이다. 반대로 날카로운 감각을 주는 재현도 있다. 이러한 재현은 기존의 웰 메이드를 거부하고 새로운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기존의 재현 방식을 거부한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상징을 사용하고 익숙하지 않은 형식을 사용한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개인에게 날카롭게 찌르는 감각'을 푼크툼이라고 불렀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에게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오는 코드가 바로 푼크툼이다. 피카소의 weeping woman 처럼 면 위에 해체된 입체를 그려내는 것은 분명 새로운 재현 형식이고 새로운 감각이다. 푼크툼을 위해서는 클래식을 '잘' 알아야한다. 피카소가 자신의 재현체계를 만들기 위해 기본기를 30년간 갈고 닦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예술에서 철학없는 테크닉은 키치하고 테크닉 없는 철학은 조악하다. 기존의 클래식을 숙달하지 못한 새로운 재현체계는 초라할 뿐이다.
여기 끊임없이 푼크툼을 던지는 공연이 있다. 고요하든, 요란하든 모든 장면은 소리지르고 있다. 끊임없이 날카로운 감각을 던진다. 환상 가족 3.0은 그런 공연이다. 환상가족은 우리의 내면에 달라붙어있던 스투디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그렇기에 이 공연은 이항대립을 좋아하는 모더니스트들에겐 불편하다. 해석보다는 그 순간의 감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환상가족은 마치 아기가 우는 것과 같다. 관객은 부모다. 아기는 울음으로 자신의 모든 필요를 요구한다. 부모는 아기의 울음을 듣고 감각적으로 그 필요를 알아챈다. 울음은 새로운 재현 체계다. 울음은 상징체계 그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각하고 수용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부모)의 몫이다. 소리지름, 울음으로 가득찬 이 공연은 다른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이 감각하고 반응하길 원한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깨달음은 예상하지 못한 마주침에서 나온다.' 라고 이야기 한다. 습관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숨쉬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물속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호흡에 대해 생각한다. 낯선 것이 사유를 '강제'하기에 우리는 생각한다. 클래식을 보면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해석하고 수용할 뿐이다. 새로운 재현체계는 곧바로 의미로 파악되는 것이 아닌 감각으로 우리에게 침입한다. 아기의 울음은 또 하나의 마주침이다. 동어반복하자면 부모(관객)은 그것을 의미로 파악하지 않고 감각한다. 환상가족은 끊임없이 관객(부모)를 낯설게 한다. 내가 '감각'한 환상가족은 상징과 해석 대신 감각과 울음으로 나를 찔렀다. 환상가족은 분명 들뢰즈와 바르트의 교차지점에 있다. 그럼 이제 환상가족의 내부로 들어가서 그 울음을 감각해보자.
관객이 입장했을 때 대부분의 공연은 무대가 비어있다. 관객이 착석하고 메인 출연자가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시작된다. 환상 가족은 관객이 입장하기 전부터 공연이 시작된다. 전시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예열한다. 관객이 입장해서 착석했을 때 출연자들은 이미 극을 진행중이다. 그들은 '호흡'하고 있다. 프롬포트를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공연 시작 시간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관객은 공연에 흡수되어 동화되는 것이 아닌, 무대로 부터 분리된다. 이후에도 이야기 하겠지만 환상가족은 소격효과를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가 관객임을 인지시킨다.
이 공연은 조대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간다. 조대상은 무대위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 공연은 조대상의 이야기다. 조대상은 환상가족 2.0에 등장한 인물인데, 이 사람은 종이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또 다른 나'로 규정한 뒤 그것을 뒷산에 묻는다. 그러다가 또 무덤을 찾아가 다시 그것을 파내는, 하나의 의례를 행하는 사람이다. 의례라는 것은 어떠한 주술적 의미를 가진다. 자신을 뭍고 파내는 행위를 한 뒤 조대상은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그 악몽은 끝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악몽인 이유는 우리가 출근을 해야하고 현실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환상'은 마약같아서 그것이 없는 현실은 비참하다.
3. 환상
이 극이 환상 가족인 만큼 환상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환상: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우리가 환상할 수 있었던 장롱은 어디로 갔는가? 의자 네개와 이불로 만든 비밀기지, 하나의 세상이 되었던 나의 욕조. 우리는 좁은 공간에서 그 모든 것을 환상했다. 이것은 분명 상상과는 다르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은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서 환상 가족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환상 가족이란 환상을 꿈꿀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로 구성된 운명 공동체다.’라는 우리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그 무엇인가’를 추적해나가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공연을 보기전 전시의 QR코드를 찍으면 볼 수 있는 텍스트다. 이 텍스트는 매우 중요하다. 환상 가족에 대한 정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이 텍스트가 가장 허접해 보였다. 내가 1.0, 2.0을 보지 않아서 그럴 수 있겠지만, 평소 텍스트의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쓰는 나에게 이 문장은 와닿지 않았다. 마치 한 동물원에서 "우리 동물원에서는 오랑우탄이 아니라 킹콩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라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다. '환상을 꿈꿀 수 밖에 없는' 현대인, 화자는 현대인을 환상을 갈망하지만 환상과 단절된 존재로 본다. 환상 가족은 이들의 공동체라는 의미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그 무언가'를 찾는다. 형이상학적 무언가를 찾는다기보단 환상할 땐 가능했던 무언가를 찾는 것에 가깝다고 해석 된다. 여기서 '환상'이라는 단어는 힘을 잃는다. 공연과 텍스트를 읽었을 때 '환상'이라는 단어는 동심, 꿈, 타협하고 싶지 않았던 의지 등을 담지한다. 동심, 꿈, 타협하고 싶지 않았던 의지라는 단어를 다시 보고 '환상'을 보자. 나는 나열된 단어들과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환상과의 연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동심, 꿈, 의지 모두 현실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에 대한 더 구체적인 정의와 의미 차용이 필요해 보인다.
4. 상징과 텍스트
앞서 말했지만 이 공연은 감각하는 공연이다. 관객의 감각, 특히 도시에서 사람들의 감각은 둔감(blase)하기에 공연의 감각을 쉽게 놓친다. 이 공연은 관객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중간중간 직관적인 상징과 텍스트를 통해 우리가 공연의 감각을 따라갈 수 있게 만든다. '성인이 되면 머리와 몸이 분리된다.' 라는 한 문장안에 환상과 단절되는 인간을 잘 표현했다. 4장 노력에서는 이 한 문장을 구연동화로 보여준다. 머리와 몸은 분리된 상태로 정지한 것이 아닌, 각자 생존을 위해 변화한다. 몸에는 털이나고 머리엔 팔이 자라난다. 이들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몸은 털을 깎아내고 머리는 팔을 잘라낸다. 사랑이라는 것은 분명 상대방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 아닌,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공연은 시작하고 얼마 뒤 함성호의 '오지 않네, 모든 것들.'을 낭독하는데, 환상을 갈망하는 현대인과 그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혹은 그 기다림에 지친 현대인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울분상태에 대한 뉴스기사를 직접적으로 인용한다. 울분 즉 자신의 신념에서 벗어난 행위를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를 현대인 대부분이 받고 있다는 기사는 몸과 머리가 분리된 인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밥벌어 먹을 돈은 벌어야한다. 조금씩 벌면서 취미를 옆으로 확장시킨다고 생각하자. 라면 사먹을 돈도 없는데,,' 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이 공연을 만든 20대 연출가에게 머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이 공연은 참 친절하다. 사실 머리와 몸, 환상과 현실의 관계를 느낄 수 있다면 이 공연의 감각을 오롯이 경험할 수 있다.
5. 프로시니엄과 소격
이 공연의 무대는 프로시니엄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관객은 공연을 TV 보는 것 처럼 하나의 틀 속에서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관객과 출연자 사이에 투명한 벽이 생긴 셈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역동적인 더 나아가 강렬한 퍼포먼스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함께 퍼포먼스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벽은 우리가 관객임을 끊임없이 인지시킨다.
연출가는 2부가 시작되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대본을 읽는다. 이것을 렉처 퍼포먼스라고 하는데, 강연이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고 그 예술가(연출가)는 개념, 과정, 주제등을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보통 정적인 예술에서 사용이 되는 형식이다. 이 공연은 이미 행위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지만, 렉쳐퍼포먼스를 통해 더 친절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가 관객임을 다시 한번 인지시킨다.
프로시니엄의 바깥으로 나오는 물건이 몇가지 있다. 함성호의 시가 적힌 종이, '또 다른 나'로 정의되는 인형은 프로시니엄을 넘어 관객 앞에 놓여진다. 환상하길 포기한 시인, 나의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 담긴 또 다른 나, 이것이 무대 밖에 놓여짐으로써 무대 밖에 있는 관객이 마치 무덤(조대상이 또 다른 나를 묻었던)속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프로시니엄과 소격효과를 통해 우리의 화법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공연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아닌, 감각을 객관적으로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6. 퍼포먼스: 아기의 울음
내가 이 공연을 보고 아기의 울음이라고 느낀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번째는 이 공연의 퍼포먼스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시작 전부터 본 공연에 큰 소리와 놀랄 장면이 등장한다고 고지한다. 두번째는 모든 것이 추상화 되어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친절한 안내를 위한 이항대립적 상징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추상화 되어있어서 감각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스쳐 지나간다.
퍼포먼스는 피아노와 국악, 퍼커션의 퓨전 위에 올려진다. 이때 세션들은 악기만 연주하는 것이 아닌, 한명의 행위자로써 무대위에 올라와 있다. 이들은 연기자와 같이 가면을 쓰고 쓰러지고 호흡한다. 배경이 아닌 한명의 출연자로써 행위한다. 무용도 한다. 무용수들은 가장 원시적 형태의 모습을 띄고 있다. 당연히 연기자도 존재 한다. 세션(행위자), 무용수(행위자), 연기자(행위자)가 펼치기에 정신이 없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눈을 열심히 굴리면서 공연을 관람했다면 그것은 매우 옳은 관람방법이다. 그 관객은 자신만의 환상 가족 3.0을 관람한 것이다. 그 관람에서 무언가 감각했다면 그야말로 연출이 원했던 관람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출은 이 정신 없는 퍼포먼스의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든다. 관객은 필연적으로 부분을 보고 그 부분에서 무언가 감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 공연은 새로운 재현체계다. 전체가 아닌 부분, 이해가 아닌 감각, 보편성이 아닌 개인성...
0. 나오며
당신은 근대인인가 혹은 현대인인가? 자신이 근대인으로써 흑백 구분이 더 편하고 계몽 및 자기 발전이 편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다. 사실 우리는 아직 볼테르 이전의 시대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대인은 필연적을 이성중심적이고 이해를 필요로 한다. 탈근대를 마친 현대인은 회색지대를 살아가며, 타인과 비교되지 않는 내면의 스펙트럼을 만들어간다. 이들은 텍스트를 해체함으로써 그 텍스트가 가지고 있던 허구성을 폭로하는 사람들이다. 텍스트의 허구성을 아는 현대인들은 그렇기에 감각적이다.
당신이 '모더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면 이 공연은 정신없고 어렵고 머리 아플 수 있다. 당신이 '포스트모더니스트'라면 혹은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이 공연에서 얻을 수 있는 감각 경험은 귀하다.
감각을 열고 아기의 울음을 들어보자, 어느 하나의 울음이 당신을 찌르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푼크툼으로써 작동하지 않는가? 우리 공연을 보고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관찰하자. 그 속에 분명히 위로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