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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ily Feb 23. 2024

안경을 벗고 바라보는 세상

이수진 작가 개인전 서문과 작품소개

Naked sight / 벌거벗은 시선


노란색 테이블에 놓인 오렌지 (이수진 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2023)

선천적으로 약한 시력을 가진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과 빛은 흐릿하게 번져있다. 대부분 안과적 수술이나 렌즈의 도움으로 평생을 사는 수밖에 없는데,  광학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시각 장애와 다름없는 불편과 고통을 운명처럼 견뎌내야 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바라보는 풍경과 사물의 색깔과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을까. 심지어 이수진 작가는 만일 안경이 분실되거나 파손되는 순간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 늘 남아있다고 한다.

자화상 (이수진 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2023)

하지만 이번 이 전시에서 작가는 단순한 시각적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타고난 방식대로 세상을 인지하는 실존적이고 당당한 작가만의 태도가 분명히 보인다.

이번에 발표하는 몇 점의 회화작품에는 작가가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바라본 세상이 그려져 있다. 약한 망막 때문에 두꺼운 특수 렌즈의 안경을 써야 했던 작가는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뿌옇고, 수채화처럼 배경에 스며들어있는 사물과 인간, 그리고 풍경을 그림으로 한번 남겨보고 싶었다고 한다. 캔버스 앞에 앉은 순간에도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벗어버린 채 말이다.

불광천 (이수진 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2023)

20년쯤 전 눈을 감을수록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는 고백을 전시회의 도록에 썼던 적이 있던 나로서는 이수진 작가가 그려낸 이 세상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시각 예술가로 활동하던 나는 그즈음에 세상의 '소리'가 주는 강력하고 근원적인 에너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다양한 사운드 퍼포먼스와 작곡, 공연을 통한 소통을 시도했다. 넘쳐나는 시각정보의 세상에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는 행위는 판단과 지각의 서열에서 뒷방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기획, 연출하고 2013년 경기문화재단이 후원한 '소리에 이르다'는 시각 장애자들을 위한 사운드아트 프로젝트였는데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단순한 악기 연주를 너머 매우 원초적이고 자유로워서 새로운 지각과 경험의 세계로 청중을 인도하는 듯했다. 그들의 약해지거나 잃어버린 시각을 과연 장애로 봐도 좋을 것일까? 우리는 그들의 경쾌하고 명랑하고 구속받지 않는, 시지각의 영역을 뛰어넘어버리는 새로운 감각을 통해 세계를 더 완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소리에 이르다'에 관한 글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기도록 하겠다.)


이수진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벌거벗은 시선'에서 1억 화소 순간포착 오토 포커싱 하이퍼 리얼 테크놀로지가 오래전에 놓쳐버린, 꿈같고 은유적인 태초의 빛과 근원적인 형태를 우리는 다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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