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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ily Mar 05. 2024

강을 건너는 소리와 불

서울시 공공 예술 프로젝트 '한강, 예술로 멈춰. 흐르다'. 2018.

 

2018년 여름 여의도와 이촌동 고수부지 일대에 꽤 많은 조형작품들이 설치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기념할 퍼포먼스 제의를 받고 나는 한강의 '역사적 의미나 장소성'에 주목해야 할지, 혹은 거대한 상징적 의미를 품은 '기운'으로 해석해야 할 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다. 수많은 시민들이 산책을 할 때나,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 이 강물은 이번 프로젝트 기획에 참여한 민병직 큐레이터의 말처럼 '멈추듯 흘러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한강은 그 위에서 배를 타 봐야 그 참맛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 퍼포먼스 제안을 받고 내가 만든 나무배로 강을 건너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부터, 카약커들과 함께 패들을 저으며 즐기던 느긋한 주말의 여유는 사라져 버렸다. 엄마와 아버지는 여길 헤엄치고 건너서 영등포로 스키야키를 먹으러 갔었다고 했고, 나는 순복음교회 옆 아파트에 살던 어릴 적에 하얗게 얼어붙은 한강 위를 뛰어다니며 박제처럼 갇혀버린 물새들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땐 고수부지도 없었고, 박정희장군과 미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림의 삐라와 갈대밭이 무성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어받았으니 자랑스러워하라고 배웠던 조국의 근현대가 고스란히 투영돼있어 서글픈 강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수도의 젖줄은 외국 관광객들이 감탄하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의 발전상을 증언하고 있지만, 어처구니없는 대교 참사,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도 등장했던 막다른 삶과 투신의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경기창작센터 입주작가로 머물며 나무배를 만들던 나는 단원고 아이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떨고 있었던 그 해 겨울바다에 이 배를 띄우고 진혼곡을 연주한 적이 있다. 내 나무배가 울림통이 되어 뱃전에 매어놓은 가야금 줄을 튕기는 내 소리가 그 아이들에게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고수부지나 높은 건물에서 멀리 보이는 강의 모습이 아니라, 옷이 젖고 너울을 올라타며 씻김과 위로와 축복을 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다시 배를 띄우기로 했다. 

너울 치는 한강을 건너는 나

하루 전날 리허설을 해 보려 했으나 그만두어야 했다. 한강에서 카야킹을 자주 하는 내게 이 정도 거리는 사실 몸풀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배도 평저선이라 안정적이니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바람이 문제였다. 태풍이 지나간 끝자락이라 아직 풍속이 귀를 때릴 정도였고 파도도 꽤 높았다. 게다가 역풍이라 맞바람을 맞는다면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당일 아침과 낮엔 바람방향도 반대로 바뀌고 물도 진정되어 희망이 보였다. 오후가 되자 내 작은 배는 광목끈으로 들쳐 메져서 하관식처럼 한강에 내려앉았다. 강원도로, 대부도로 십 년 동안 묵묵하게 나를 따라다닌 벗이다. 배를 탈 때 입을 두루마기와 모자를 직접 만들어서 그 위에 기획자의 글과 참여작가의 텍스트를 모조리 붓글씨로 적었다. 이는 일종의 '문지방 넘기'로, 이제까지의 '물'에 대한 기억들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일어날 '강 건너기'에 대해 차분하게 마음을 채워나간 준비였다. 학창 시절 암기과목을 갱지에 볼펜으로 줄기차게 베껴댔던 생각도 났고 꼬맹이적에 눈다래끼가 났을 때 동네 구멍가게 할배가 내 발바닥에 붓으로 써주시던 뜻 모를 부적 같은 지렁이 글씨들도 떠올랐다. 간절한 마음을 흰 종이에 정성껏 옮겨 적으면 분명히 어딘가에 가 닿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복날 더위를 버텼다. 시간과 간절함과 은유가 접히고 잘려나가고 이어 붙어서 제의의 오브제가 된다니 얼마나 놀라운 환생인가.

한강을 건넌 배

배를 내리고 자리에 앉아 노를 잡자 물결이 만만찮다. 옆쪽에서 오는 센 너울만 잘 피하면 건너가는 건 해볼 만했다. 이촌 나루를 떠난 배는 바람과 너울에 방향을 계속 바꾸며 한 시간 좀 넘어 여의도에 도착했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멀찍이서 따라오던 구명보트에 탄 친구들이 내내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대학시절에 살던 동부이촌동을 떠나 내가 다니던 여의도 초등학교 바로 옆 원효대교 모래톱에 강물을 흠뻑 머금은 채 배가 들어와서 교각 밑 공터로 옮겨졌고, 종이꽃과 종이옷에 불이 댕겨졌다. 배 옆구리를 가로질러 걸었던 가야금 줄은 불이 닿자 아이들 웃음소리같이 탱탱 소리를 내며 끊어졌고 부적 같은 종이옷과 모자, 꽃도 허공에 날며 재로 변했다. 족히 석 달을 애썼던 고민과 준비가 한순간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이 소리와 불을 느껴서 위로받고 평온해 지기를 기원해 본다. 훗날에도 많은 이들이 이 멋진 강가에서 변함없이 휴식과 여유를 즐길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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