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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ily Jun 01. 2024

당신을 조종하는 소리

관객 참여 보이스 퍼포먼스 '프로파젠더' / <베를린>, <서울>

우리는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정권, 미디어, 루머, 통념에 의하여, 혹은 (심지어) 매일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그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 교활한 야수의 은밀한 권력에 우리의 판단과 세계관, 가치관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파젠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민중을 조련해오고 있으며, 분단과 현대화의 근대사에서 독재와 억압의 민낯을 드러낸 적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합리적 가치는 영화나 광장의 구호에서나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어두운 먹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곤 합니다.

우리는 명백하게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프로파젠더'는 2016년 독일 베를린 노이쾰른에서 열린 '48 Hours' 아트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관객참여형 보이스 퍼포먼스입니다. 사전에 섭외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참여자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출력한 텍스트를 무작위로 전달하고 이를 소리 내어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리허설은 없었고 연출자인 내가 어떤 연기도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무보수의) 출연자들은 자유롭고 편안하게 퍼포먼스를 시작해 주었습니다. 한 명씩 텍스트를 읽기 시작하는 이들에게 내가 다가가서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부터 프로파젠더가 발효되었으며, 출연자들은 꼼짝없이 내 지시를 따라주었습니다. 이 공연은 이후로 서울에서도 몇 차례 계속되었으나 내 지시를 거역한 퍼포머들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무대 위에서 연출가의 위력이 절대적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기획단계부터 퍼포머들의 집중력을 의도하진 않았지만 내 지시대로 움직여주는 동작과 목소리는 퍼포먼스를 더욱 진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개인의 발언들은 점차적으로 증식하고 충돌하고 상호 간섭하며 마침내 공간을 채우는 거대한 덩어리가 된다. 사고하고 결정하는 자아의 개별적 가치는 희미해져 가고, 해석 불가능한 괴수의 울부짖음만이 터져 나온다.'


나는 참여자들의 귀에 '당신 옆의 저 남성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텍스트를 읽어서 그를 무시해 보는 건 어때?', '푸른색 치마를 입은 여성의 주위를 맴돌면서 조롱하듯 텍스트를 읽어볼까?', '저기 앞에 보이는 동양인의 옆에 서서 당신의 유창한 핀란드어를 들려주자고.' 등의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요구를 계속했습니다.

맴돌고, 속삭이고, 유혹하고, 자극하고, 위로하고, 부추기고, 명령하는 거부할 수 없는 기운에 이끌린 10여 명의 퍼포머들은 이내 자신들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으로 무대를 채워 갔고, 나는 그들을 점점 하나의 작은 원 안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참여자나 관객 모두 이들의 말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개인의 언어는 그 의미와 역할을 박탈당한 채 공연장을 지배했습니다. 퍼포머들이 잃은 것은 언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고하고 발언하고 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공연은 최고조를 향해 갑니다.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긴다는 말도 쓸모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전쟁터에서 뒷걸음질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괴수의 울부짖음이 계속되고 5분 후쯤의 한 순간에 내가 참여자 모두에게 '중지!'라는 고함을 지릅니다. 참여자들 모두 숨을 헐떡이며 침묵을 지켰고 관객들 역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적막 속에서 잠시 머물러 주었습니다. 내가 '감사합니다.'라는 엔딩 시그널을 주자 모두들 안도하며 '불편했던' 보이스 퍼포먼스에 박수로 답례해 주었습니다. 나로서는 매우 감격스럽고 기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모두 다 짧았던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았고 축제는 계속되었지만, 적어도 그날의 공연을 함께한 이들의 기억 속에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는 직설적인 경험이 남아있기를 기대합니다. 다만 잘 드러나지 않는 교활한 조종에 어떻게 대처할 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서울 무대륙에서 공연된 'propaganda seoul'

https://youtu.be/fNqz7ywGQE0?si=ieOiHknJ0W1CUv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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