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해도 다시 보자, 칸트

부끄러운 도덕 수업 이야기

by 이천우

고딩시절, 학교 근처 보수동 헌책방에서 책을 훔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논리는,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였다. 문학을 사랑하는 소녀가 돈이 없어 책을 사지 못한다면 세상은 당연히 그 소녀에게 책을 제공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헌 책을 훔치는 것은 유행하는 옷을 훔치거나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훔치는 것과는 당연히 다르다며 내심 우쭐한 마음도 있었다. 그때 표지의 남자가 잘 생겨서 훔친 노란색 책이 솔출판사에서 나온 《기형도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소녀는 발각되지 않았고 그 후로 평생, 기형도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부끄럽게도,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철학과 학부시절, 우리는 누구나 니체나 마르크스에 매료되었다. 발터 벤야민이나 푸코도 멋졌다. 그들은 정신병자에 도망자, 자살자, 동성애자, 파격적이고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칸트는 평범하고 어렵고 지루한 철학자였다. 게다가 여행이나 불 같은 사랑, 혁명을 해 본 적도 없는, 골골해하면서도 천수를 누린 시골 샌님이었다. 한글로 쓰여 있어도 그의 책은 한쪽은커녕 한 문장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 대부분은 칸트 철학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채로 졸업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세상에 닳고 너덜너덜해진 채로, 필연적으로, 다시 칸트를 만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도덕 수업 시간, 아이들과 함께 '내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첫 번째, 자신의 장기적 이익 증진, 사회 속 나의 평판과 명예를 위해서

두 번째, 모두의 이익 증진, 서로의 안전과 효율을 위해서

세 번째,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조건 옳기 때문에

네 번째, 품위를 지키며 훌륭하게 살기 위해서


여기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실용성과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 입장이고, 칸트는 세 번째, 의무론적 입장이다. 이를 테면, 살인마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어떤 여자의 행방을 묻는다. 나는 조금 전,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던 그 여자를 숨겨 준 참이다. 그 여자의 행방을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할까. 칸트는 그 순간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여기서 많은 학생들이 의아해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인데 왜 잘못인가, 너무 융통성 없고 냉정한 것 아닌가.


살인마에게 그녀의 행방을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하지만 세상에 닳아 너덜너덜해진 어른인 나는, 이제는 확실히 칸트 편이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도끼를 든 그 남자가 살인마처럼 보여도 사실은, 딸을 애타게 찾는 나무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여자는 남자의 귀한 물건을 훔쳐 달아난 도둑일 수도 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또, 내가 여자를 못 보았다고 거짓말을 해 살인마가 반대방향으로 갔는데 공교롭게도 거기서 여자를 마주칠 수도 있다. 그때는 내 선의의 거짓말 때문에 그녀가 죽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사건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 사람과 사물의 진상을 꿰뚫어 볼 수도 없다. 다만, 내 행위의 동기, 내 선의지만을 컨트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 겸손하고 단호하게, '최선'을 다해, 옳은 행동,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 옳은 행동인가. 사람은 주관적인 존재라 저마다의 옳음이 다르지 않던가. 신의 율법도, 왕의 명령도, 혹은 쾌락의 총량도 옳음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옳음은 바로 내 안에 있는 나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첫 번 째는, '역할 교환 검사', 나와 도끼 든 남자의 입장을 바꾸어 본다. 내가 도끼 든 남자라면, 지금 애타게 찾고 있는 여자의 행방에 대해, 나의 내밀한 사정도 모르 누군가가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두 번 째는 '보편화 결과 검사',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겉모습만 보고 그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모두가 거짓말하는 세상,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대답은 모두 No. 그래서 살인마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라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내가 헌책방 주인이 되어 본다. 한 권을 팔아도 마진이 천 원 남을까 말까한 책을 누군가가 훔쳐갔다. 이제 마진 천 원은커녕 그 책을 매입했던 원금, 삼천 원의 손해만 남았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며 하루 종일 일 했는데도 수입은커녕 손해만 남는다면 나는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가난한 문학소녀, 문학청년들이 감시가 허술하다는 이유로 너도나도 헌 책방에서 책을 훔쳐간다면 헌 책방을 열려는 사람이 있을까, 좀도둑들 때문에 아무도 헌 책방을 열지 않는다면 가난한 문학소녀는 이제 어디서 책을 사야 할까. 그러므로 25년 전의 나는 잘못했다. 가난하다느니, 책을 사랑한다느니 하는 것은 그저 자기 위주 편향의 핑계일 뿐이다. 또 그런 무수한 사정을 다 봐주다 보면 결국 헌 책방 없는 세상, 도둑질하고도 배째라는 세상이 되고 만다. '언제나 너의 행동의 준칙이 보편 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 칸트가 옳았다. 칸트 덕분에 우리는, 신이 24시간 지켜보지 않아도, 유황불 지옥 같은 걸로 협박하지 않아도 인권이나 생명 같은 절대적인 가치를 스스로가 단호하게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예외적인 사건들이 늘 뉴스에 나오긴 하지만)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가르치면서도 늘 부끄럽다. 내가 도덕군자가 아니라서 부끄럽고, 더 쉽게 더 잘 가르치지 못해 부끄럽고, 《실천이성비판》 같은 책을 술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부끄럽다. 도덕 수업시간이면 학생들보다 내가 더 많이 반성하고 내가 더 많이 배운다.



*참고자료

-EBS 다큐프라임, 철학하라 3부, 왜 그대가 옳은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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