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남편은 갓 태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두려움에 낑낑대던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제주 공항에서 처음 만났다. 남편은 그 강아지에게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 끝자 '월(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를 잃고 백만 원에 팔려온 강아지 월이와 가족과 멀리 떨어져 홀로 고군분투하던 남편은 그렇게 서로의 곁을 지켰다.
그 후 이런저런 삶의 변고와 잦은 이사 등으로 더 이상 개를 키울 수 없게 되자 시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에 월이를 버리다시피 맡기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살던 개 월이는 그때부터 시골 마당 똥개로 지내게 됐다.
시부모님의 집이 팔리고 시부모님마저 월이를 키울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월이를 다시 아파트로 데려오게 됐다. 시골마당에서는 그렇게 밤낮으로 사납게 짖어댔다는데 아파트에 온 월이는 웬일인지 다시 조용해졌다. 밥시간이면 두 발로 서서 펄쩍펄쩍 뛰고, 저녁이면 느긋한 산책을 즐기는 평온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언제부턴가 월이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사료를 너무 많이 줬을까, 혹시 임신한 걸까, 괜찮겠지, 별일 아니겠지, 개니까 뭐, 사람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 걸... 다가오는 불행의 징후들을 애써 무시하며 지내던 어느 날. 점점 더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동네 동물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문제가 심각해 보이니 큰 동물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백만 원에 가까운 검사비용을 쓰고서야 월이가 '심장사상충 감염 3단계'인 것을 알게 됐다. 기생충들이 이미 월이의 심장 안을 가득 점령한 상태라 약물이나 수술로도 손을 써 볼 수 없는 단계라고 했다. 복수를 1000ml 나 빼냈어도 월이의 배는 아직 불룩했다. 복수는 이내 다시 차오를 것이며 적혈구가 빠르게 파괴되고 있는 상태라 머지않아 검은뇨를 볼 것이라 했다. 또 언제든 혈관이나 기도가 막혀 급사할 수 있다고도 했다.
심장사상충예방약을 매달 한 번씩 먹여야 한다는 건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다. 무시무시한 심장사상충 감염을 간단한 알약 한 알 만으로 예방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편리하고도 감사한 일인가. 조그마한 결핍이나 불편도 참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쿠팡을 들락날락했으면서, 온군데 맛집은 집요하게도 찾아다녔으면서, 매일 자신을 위한 비타민 두 알은 꼬박 챙겨 먹었으면서, 키우는 개를 위해 심장사상충 약 한 알 사 먹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제 월이는, 그토록 믿고 사랑하던 주인의 무지와 나태로 죽는다. 매일매일 복수가 차오르고 매분 매초 숨을 헐떡대며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시간만이 이 개에게 남아있다.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 늘 방관자적 입장에서 월이와 살아온 나. 개 똥을 치우거나 목욕시킨 것도 몇 번 되지 않는다. 다가올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여전히 주인이 쓰다듬어주기만을 바라는 개 월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토록 검고 맑은 눈에, 곱슬거리는 아름다운 털을 가진, 우리와 정답게 교감했던 이 생생하고 선량한 생명체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평생 남편을 지켜주셨던 고마운 할머니의 이름자를 붙인 개 월이. 우리가 키우던 우리 집 개 월이. 우리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우리 죄의 깊이를 아직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