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난한 Jul 21. 2023

벌 줄 사람이 마땅히 없어서,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평범한괴식일기

대단치 않은 어른이 되고 나쁜 점은 그것이다. 나를 벌 줄 사람이 없다. 형태와 밀도는 달라도 사람마다 품고 있는 박애와 순정을 믿는 편이다. 자칭 박애주의자이자 극단적인 사랑 신봉주의자이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사람들마다 표현법이 달라서 쉽게 오해하고 찢어지고 갈라진다.


회사 안에서 크고 작은 일이 벌어지는 건 어디서나 일상사일 테다. 그때의 나에게도 그랬는데 하필이면 내가 원인이었다. 아직도 사회의 때가 덜 탄 애송이지만 그땐 퍽 신중하지도 못했다. 내가 한 말실수로 나의 동료가 곤란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왜 그랬지.

아씨 진짜 그 말은 하지 말걸.


끈 떨어진 인형처럼 겨우 퇴근을 하고 전철 플랫폼 앞에 서서 중얼중얼. 하필이면 그때는 노조 파업으로 열차가 언제 오고 가는지 가늠을 할 수 없어 모두에게 열차 하나하나가 귀하고 소중한 시기였다. 따라서 앞뒤로 몰리는 인파에 나는 후퇴도 전진도 할새 없이 콩나물시루 안의 콩나물이 되어버렸다.

  

발을 밟히고 밀쳐지고 산만 한 백팩에 얼굴을 짓눌려도 내 안의 가학심은 도통 사그라 들지 않았다. 상대에게 혹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을 벌인 나를 아주 때리고 벌주고 싶었다. 그런 중에도 하루 종일 그 일에 매몰된 몸뚱이는 허기까지 느끼는 게 아주 괘씸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꺼내든 것은 매운라면 봉지.

감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도 허기를 느끼는 나 자신아, 아주 혼나 봐라.

냉장고를 털어내 나를 혼내기 마땅한 재료들을 건져냈다.


마요네조, 불닭소스, 말린 홍고추, 간마늘, 고수


말린 홍고추, 불닭소스, 간마늘, 마라탕 시킬 때에 따로 담아준 고수. 나의 위장과 뱃살을 아주 훈육해줄 것들을 긁어 모았다.

각종 재료들을 벌을 세우듯 나란히 줄을 세우고 다시 괴식의 막을 열었다.


이름하여 고수마요면.


조리법은 아래와 같으나 건강을 우선시한다면, 특히 그 다음날 화장실에서 오래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싶지 않다면 추천하진 않겠다.

 

1. 냄비에 물을 받아 매운 라면의 면만을 삶는다. 면을 절반 정도 삶은 후, 라면 스프를 녹일 만큼의 물만 남기고 버린다. 그리고 라면스프 반절 정도 넣고 면과 함께 비빈다.

(+ 틈새라면, 킹 뚜껑, 열라면, 라면의 종류는 상관없다. 그저 나를 벌 줄 만큼 ‘맵기만’ 하면 된다.)


2. 비빈 라면에 붉닭소스 반 스푼, 간 마늘, 반 스푼을 넣고 1~2분 정도 약간 졸인다. 그 후, 말린 홍고추를 나를 혼내고자 하는 양만큼 손바닥으로 부수어 넣는다.

(+ 당시 나는 한 움큼의 고추를 부수어 넣었는데 그 손으로 눈을 비비는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더한 벌을 받았다.)


3. 다진 고수를 올린 후, 마요네스를 뿌린다. 마지막으로 날계란을 깨어 넣는다.

(+ 나는 날계란을 잘 먹을뿐더러 매우 좋아한다. 날계란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권하진 않겠는데 이 요리를 따라할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라면인 만큼 면을 빨아들이면 첫입의 식감이 그럴듯하다. 마요네스의 고소함과 날계란의 풍요로움이 더하여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데 방심하면 안 된다. 곧이어 홍고추의 묵직한 펀치가 날아오기 때문이다. 홍고추의 펀치에 얼얼한 혀 위로 비웃듯이 고수의 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헤집고 지나간다. 덕분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십자가를 진 예수처럼 젓가락을 이고 냄비 안의 고행길을 이어간다.


그래, 어린 날에는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이 나의 훈육자가 되어 주었다. 남의 것을 함부로 탐할 때, 싸울 때, 나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쓸 때 혼을 내주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람 사이에 으레 있어야 할 것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누구 하나 명확하게 짚어주지 않는다.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명확한 것은 모호하게, 모호한 것은 더 모호하게 된다. 그런 것들이 안개가 되어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자꾸 방해가 된다. 진심을 찾기 힘들다. 그저 상처 받은 자와 상처 준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내일 다시 이야기해 봐야지.

그리고 다신 그러지 않아야지.


젓가락을 휘적이며 냄비 바닥에 반성문을 쓴다. 홍고추 펀치 덕에 다시 한번 정신이 번쩍 든다. 이 도시에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선 항상 허리를 세우고 잔뜩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연약하고 이 도시는 모서리 진 부분들이 많아 자칫하면 상처주기 십상이니 말이다.


다 쓴 반성문을 개수대에 제출하며 다시 내일을 기약한다.

라면 선생님, 다음 야단도 잘 부탁드립니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작가의 이전글 자취 첫날 나에게 주는 부드러운 위로, 양배추 물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