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괴식일기
세상은 참 괴상하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싸우고 서로의 마음을 할퀴기 일쑤이며, 어떤 사람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안달을 낸다. 때로 우리는 다른 이의 선심과 인정을 악의로 오해하기까지 한다.
엄마는 나에게 친절과 다정을 베푸는 것이 이기느라 가르쳤다. 엄마의 가르침에 따라 항상 선심과 인정을 무기처럼 두르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사는 이곳에서 그리 노력하는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이기지도 쟁취하지도 베풀지도 못하는 어중간하고 슬픈 삶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괴상한 세상에서 내가 바꿔 든 무기는 바로 ‘괴식’. 나를 달래고 벌 주고, 또 상을 내리는 나만의 유일한 수단. 그것은 바로 음식이다.
왜 하필 괴식이냐 한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에게 지지와 환대를 받을 만한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양가, 맛, 칼로리 같은 건 상관 없다. 내 감정이 찾는 재료, 내 기분이 원하는 맛, 내 고단함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조리법. 오직 나만을 위해 다듬고 자르고 깎고 조리된 음식이기에 ‘괴식’이라 칭하고자 한다.
나의 직장은 서울에 있다. 따라서 나의 자취방도 서울에 있다. 내가 선택한 직업을 따라 나의 조건에 알맞은 장소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모든 것이 나의 의지 아래였으니 참 행운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서울에 홀로 살이를 꾸릴 때만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자취방에서 첫 밤을 보낸 날. 그날은 1월의 겨울이었고 나는 독감에 걸렸다. 따끔거리던 목은 이제 더 기능조차 않고 고통뿐이었으며 끝내는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직장에서는 메신저로, 혹은 필담으로 소통을 대신하는 사태가 펼쳐졌다. (끝내는 재택을 했다.) 덕분에 인어공주라는 웃픈 타이틀까지 획득했는데 참혹하게도 당시 그런 상태가 한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사춘기 때부터 대단치 않은 성인이 될 때까지 홀로서기는 나의 로망이자 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립하든 못 하든, 그것은 각자의 환경에 따라 갈라질 길일 뿐이지 내면의 단단함과는 무방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모서리가 닳은 강하고 굳건한 사람이고 싶어서 항상 홀로서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항상 꿈꿔왔던 나의 홀로서기는 원활하고 수월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자취를 시작한 첫날 밤. 그 방 안에 있는 거라곤 침대와 물을 데우는 포트, 그리고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뿐이었다. 자취방 한쪽은 큰 창이 자리하고 있어서 찬 바람이 창으로 기꺼이 침입했다. 하지만 커튼을 포함한 다른 가구들은 아직 배송 중이었고 몸뚱이와 포트밖에 없는 나에겐 바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저 추위에 덜덜 떨며 목소리를 가져간 마녀 대신 바람을 원망할 수밖에.
그때 나를 돌볼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서 아픈 몸뚱이를 붙들고 있는 나에겐 책임감이 막중했다. 왜냐. 약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목이 너무 부은 나머지 몸은 자꾸 음식을 거부했는데 낫기 위해 약은 먹어야 했다.
열에 들뜬 이 짐만 되는 몸을 이고 겨우 앞의 마트로 향했다. 물만 삼켜도 괴로운 몸일지라도 무엇이라도 넣어야 이 고통이 끝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짐승들이 오가는 열대 우림에서 식량을 구하듯 겨우 나는 겨우 세 가지 물건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다, 나의 자취 생활의 가장 첫 식사는 ‘양배추 물밥’이었다. 당시 음식을 거부하던 나의 몸을 어르고 달래 겨우 허락되었던 재료들로 선정되어 탄생한 요리, 아니 괴식이었다.
제멋대로 지은 음식명이지만 이제는 바람을 막아줄 커튼이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안락한 지금의 자취방에서도 가끔 찾는 괴식이다.
조리법은 음식명과 같다.
1. 데운 즉석밥을 그릇에 옮긴다.
(+물론 그때의 나에겐 말했다시피 침대와 포트밖에 없었다. 따라서 집에 마땅한 그릇조차 없어서 밥을 덜어내 즉석밥 그릇에다가 했다.)
2. 손으로 양배추를 찢어, 양배추를 넣고 물을 붓는다.
3. 참치액(어떤 액체 조미료이든 상관 없을 듯한데, 몇 번 먹어보니 내 입맛에는 연두가 알맞다.)를 적당히 넣고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당시 전자레인지 또한 없어서 안 익은 양배추를 먹었다. 당시 무슨 정신으로 하필 양배추를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마냥 색 없는 흰죽을 먹기에 싫었다. 아무것도 없는 흰죽을 먹기보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챙겨주고 싶었던 기분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조리법처럼 맛 또한 간단하다. 심심한 국물에 적당히 풀어진 쌀알이 입 안을 헤집고 다닐 때쯤 물컹한 양배추가 침투한다. 무언가를 씹는 행위는 중요하다. 그때 느꼈던 것 같다. 그때만큼 음식을 천천히 먹었던 때가 없었기 때문일까. 잠시 나를 힘들게 하던 목 언저리의 고통과 다음날의 출근, 그리고 앞으로 이제는 홀로 겪어야 할 모든 것들을 잊은 채 나는 양배추를 씹는 행위에 집중했다. 씹을수록 달달한 채소만의 단맛이 꽤나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때 아픈 나에게 자극은 독감이 주는 고통뿐이었는데. 온온하고 따뜻한 감칠맛의 미각이란 부드러운 그 자극이 앞으로도 혼자 잘 할 수 있을 거란 위로가 되었다.
때로 지금도 속이 따끔할 때 찾는다. 정확히는 소음과 빛 그리고 네온사인, 휴대폰의 불빛, 거리의 고함소리와 같이 사람이 내는 인기척과 효과에 너무 피로할 때 찾는다. 밍밍하고 밋밋한 맛이 위로와 함께 앞으로의 하루를 북돋아 준다. 온갖 자극에 질렸을 때, 부드러운 위로가 필요할 때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