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너머에

1. 제논(4)

by 서윤혁

그 다음날부터 이틀 정도 동안 시호는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간다는 말을 자주 했다. 제논이 자주 듣는 말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똑같이 일 초에 한 번 움직이는 초침이 빠르게 움직이기라도 한다니. 보통 시호는 아주 바쁠 때 그런 말을 사용했는데, 정신 없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았다. 이틀 연속으로 마트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취소해야 할 정도로 상담이 많이 잡혔다. 오전 상담 중 몇 개가 미뤄져서 밤 늦게까지 일해야 했는데, 시호는 밤에 예약을 잡아두지 않는 대신 미뤄진 상담은 반드시 그날 끝냈다. 이 주를 정확히 맞춰서 상담을 잡아서, 하루라도 미뤄지면 안 되는 환자들 때문이었다. 보통 상담을 미루는 건 벽 밖에서 찾아오는 이들이었다. 벽 안의 사람들은 시간을 맞춰서 나갔다 들어와야 했고, 형식적이지만 꽤 귀찮은 허가를 받아야 했으니 약속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시호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상담이 밀리는 걸 이해해줘야 한다는 말을 자기 세뇌처럼 반복했다.


“ 벽 안은 규칙적인 삶이 있어서 약속도 잡을 수 있는 거니까. 여기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고 약속을 취소하면,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저 안에서는 절대 일어날 리 없는 불규칙한 일들이. ”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말은 벽 밖의 사람들이 상담을 미룰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유였다. 그러면 시호는 그들에게 더 물으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밤이 되고 어쩔 수 없었던 일이 해결되면 반드시 찾아왔다.


“ 어차피 사람들은 와야 되고, 마트 가는 거 말고는 할 것도 없으니까 기다려주는거지. 약속 좀 늦었다고 줬던 걸 빼앗아버릴 수는 없으니까. ”


제논은 시호가 말한 그녀가 환자들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단순히 상담을 의미하는 걸까. 시호는 그들에게 그보다는 좀 더 큰 무언가를 주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밤늦게 수민에게서 전화가 오자 시호는 내일은 반드시 찾아가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수민은 이틀이나 준과 재미없는 내기를 단둘이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아냐며 그녀를 닦달했지만, 끝에는 바쁘면 안 와도 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 내일은 벽 안에 다녀오려고. ”


시호는 불을 끄고 소파에 누운 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말을 제논이 별로 반가워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그 생각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벽 안을 찾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상담 주기가 한 번 돌 때마다 한 번씩은 다녀오는 듯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가면서도 그 이유는 한번도 말해주지 않은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제논이 그녀가 벽 안에 가는 걸 말리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안에 다녀온 날이면 그녀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는 했는데, 그녀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제논이 자신의 기분 상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제논은 그녀가 그럼에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답답했다. 그럼에도 결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반응은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는 말로 설명될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말을 꺼냈다가 그녀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터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제논은 시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개월째 조금씩 눈치를 주면서 기다리는 제논과, 몇 개월째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말해줄 생각은 없는 시호의 전선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 일찍 조용히 짐을 싼 시호는 전날 자신이 직접 껐던 제논의 전원을 다시 키지 않은 채 나갔다. 자신 없이는 굳이 집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는 제논이 그 시간을 아주 심심해 한다는 사실을 아는 시호의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러니 제논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시호가 돌아온 네 시쯤이었고, 둘은 그날의 상담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쉬려고 했다. 그러나 시호는 일하는 내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원래도 별 의미는 없는 상담자와의 대화였지만 그녀는 전혀 집중하고 있지 않았고, 두 번째 상담에서는 결국 환자가 시호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일까지 생겼다. 제논은 이 시점부터는 시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아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시호를 이대로 놔둬서 보는 손해가 더 크다는 판단을 내렸다. 두 번째 손님이 떠나자마자 자신의 판단을 전달하려 하는데, 시호가 제논을 가로막았다.


“ 나 괜찮아. ”


“ … ”


“ 아마도. ”


전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안도를 주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제논은 동시에 시호가 자신을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이대로는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상담은 한 건밖에 안 남았으니 괜찮기를 빌어야 했다.


가끔은 그냥 하늘에 비는 걸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하필 오늘은 조금 운이 나쁜 날이었다. 마지막 환자가 찾아와야 할 때쯤 전화가 울렸고,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횡설수설했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겨서,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 시호가 폭발했다. 평소에는 투덜거리면서도 환자를 이해해주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그녀가. 시호는 전화기에 대고 처음 들어보는 욕을 남발했고, 제논은 급하게 전화기를 빼앗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시호는 전화를 끊어버렸고,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메시지를 전달한 전화기를 제논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그 길로 집을 뛰쳐 나가버렸다.


제논은 당황했지만 공황에 빠지지는 않았다. 대신 어디서부터 잘못된 판단을 내렸던 것인지 생각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괜찮냐고 물었어야 했나. 아니면 오늘 상담을 전부 미뤘어야 했나? 하다못해 그 전화라도 자신이 대신 받았다면 그녀가 폭발하는 일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는 아니었지만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옆에 시호라도 있었다면 자신의 머리를 아프지도 않은 주먹으로 때려줬을 텐데.

그러나 지금 그런 생각에 잠길 여유는 없었다. 제논이 시호보다 뛰어난 일 중 하나는 이럴 때 침착하게 행동하는 일이었다. 우선은 가장 급한 밀린 상담을 해결해야 했다. 제논은 빠르게 기록을 뒤져서 다음 환자를 찾았다. 이름이 ‘세원’으로 저장된 걸 보니 역시 벽 밖의 사람인 듯했다. 다행히 이 주보다 여유롭게 예약을 잡은 덕분에 이틀 정도 여유가 있었다. 연락처를 찾아 혹시 상담을 내일로 미룰 수 있냐는 메시지를 우선 전송했다.


다음은 시호를 찾는 일이었는데, 제논은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갈 만한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트 뿐이었다. 그곳에 없으면 진짜로 당황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예상 그대로 그곳에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괜히 그녀에게 알리기라도 할까봐 미리 준에게 알리지 않고 마트를 찾아간 것이 유효했다. 시호는 마트 계산대 뒤로 천천히 들어오는 제논을 보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수민이 그 표정을 보고 픽 웃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 중 그 표정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건 시호가 할 말이 있지만 쪽팔려서 못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럴 때는 별다른 행동 없이 기다리면 그녀가 먼저 말을 열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미안. ”


제논은 괜찮다는 말이 조금 상투적인 것 같아 대답을 고민했는데, 그 찰나에 수민이 기회를 빼앗아갔다. 수민은 언제나 그렇듯 버겁도록 높은 텐션으로 ‘괜찮아’를 연발했는데, 제논이 오기 전에 셋이 맥주라도 마셨는지 얼굴이 괜히 빨갛게 보였다. 우선은 마음을 조금 놓아도 될 것 같았지만, 시호가 정말 괜찮아진 것인지, 괜찮은 연기를 잘 해내고 있는지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시호는 수민을 진정시킨 뒤 자연스레 빔 프로젝터를 가져왔다. 영화는 그 셋이 마트에서 내기 게임만큼이나 자주 즐기는 취미였는데, 하필 셋 다 옛날 영화를 좋아해서 제논은 본 영화를 또 보고 또 봐야 했다. 오늘 밤 시호의 선택은 역시 여러 번 봐서 결말까지 생생하게 기억 나는 작품이었다. 물론 제논에게는 한번만 봤다고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지구가 살기 어려워지고, 한 부자가 지구 궤도에 소수만이 살 수 있는 인공 도시를 만든다. 그곳은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남겨진 지구는 폐허가 된다. 그 뒤의 줄거리는 그냥 뻔하디 뻔한, 인공 도시를 세운 세력이 실은 흑막이었고 주인공이 그들과 싸우는 내용이었다. 현실적인 걸 넘어서, 전쟁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만 빼면 현실의 지구와 기분 나쁘도록 비슷한 줄거리였다. 시호가 이 영화를 고르는 건 보통 오늘처럼 벽에 다녀온 날이었다.


영화가 반쯤 지날 무렵이었다. 우주선 여러 대가 격추되는 나름 화려한 전투 장면이었는데, 시호가 소리를 줄여놔서 분위기가 잘 살지는 않았다. 주인공이 탄 우주선이 온갖 방해를 뚫고 인공 도시에 침투했을 때, 시호가 한번도 한 적 없는 말을 던졌다. 그녀는 이미 영화에서 집중을 거둔지 오래였다.


“ 너희한테 우리 엄마 얘기 한 적 한 번도 없지? ”


아까 사과할 때보다도 한 옥타브 정도 낮아진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잔뜩 긴장한 준과 수민의 태도를 본 제논은 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을 수 없었던 주제를 오늘 처음, 그것도 벽에 다녀 와서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아진 그녀가 꺼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아니 로봇이라도 알 수 있었다. 시호의 어머니는 벽 안의 사람이거나, 적어도 벽 안의 세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 없지. 물어봐도 안 알려줬으면서. ”


수민이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툴툴댔을 때, 제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짧은 침묵이 찾아오자 수민 역시 자신이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 내가 상담을 한번 받은 이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받는다고, 아니 받아야 한다고 했잖아. ”


“ 그렇지. ”


셋 모두 제논과 상담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았지만 준만이 유일하게 짧게 대답했다.


“ 그러지 못한 사람이 한 명 있었어. ”


제논은 시호가 아까 수민의 반응 때문에 말을 돌리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직감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에는 벽 안에 살았던 소녀와 그녀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종말에는 그 소녀가 벽 밖의 허름한 마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 찾을 때는 그렇게 안 나타나더니, 돌아가셨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되더라. ”


다음주에는 2. 시호 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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