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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지아 Aug 20. 2023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하다.

나의 잣대, 너의 잣대


전 시모 때문에 너무 힘들었을 때,

전 시모와 시부와 같은 교회를 다녀 그들을 아는 분께 고민과 힘듦을 토로하며 조언을 구했었다.

그분은 나보다 거의 20살이 많은 분이셨다.

어떻게 하면 시모가 누그러들지,

어떻게 하면 전남편과 잘 살 수 있을지,

나보다 어른이시니 혜안을 주실 거라 생각하고 종종 연락을 드려 방법을 간구하고자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상당히 쿨하게 말했다.

"하나님이 너한테 그런 시련을 주신 이유가 있을 거야. 하나님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셔. 지금 가 겪고 있는 건 다 네가 견딜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시련을 주신 거야.

항상 기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 돼"


나는 이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저런 교인들이 가득한 것을 알기에.


그녀는 얼마 전 내게 전화가 왔다.

"XX야. 우리 시어머니가 미국에서 오셔서 한 달째 우리 집에 있는데, 나 정말 미칠 것 같아. 넌 이전에 어떻게 너네 시어머니 견뎠니?

사실 근데 너는 강한 애잖니. 너는 강해서 이혼도 쉽게 잘했고 지금도 잘 살잖니.

나는 연약한 사람이라 못 견디겠어. 정말 너무 우울하다"


아. 나는 이혼도 쉽게 잘 한 강한 여자구나.

몇 년 동안 그렇게 힘들어했던걸 지켜보고도

내게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내 선택에 대해 난 저런 소릴 듣는구나.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다.


나는 이혼을 함으로써 이해심이라는 큰 자산을 얻었다.

(혹자는 에코이스트 성향인 내가, 타인에 대한 이해심을 더 키울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지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곳 브런치에서 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내가 직접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며 굳이 열심히 내 글에 댓글을 달며 비난한다.


절 이해 못 하신다면
굳이 상처주지 마시고 꺼져주세요. 제발.



어릴 적 나의 엄마는, 이혼가정의 친구들과는 친하지도 못하게 했다. 이혼가정의 아이들은 상처가 있기에 문제가 많은 애들이라는 이유였다. 


그런 내가 이혼녀가 되었다.

나는 나처럼 이혼을 한 사람의 아픔을 이해한다.

나는 힘들게 매번 아이와 면접을 하지만,

이혼한 후 아이를 만나지 않는 부모를 이해한다.

아이를 직접 양육하며 여러 감정들을 겪는 가정들을 이해한다.

부모들이 이혼을 선택하며 하는 여러 다양한 선택들을 존중한다.

이혼가정의 아이들이 가진 상처를 이해한다.

아이들은 죄가 없지만 그들이 자연적으로 지니는 결핍을 이해한다.


하지만, 통상 정상적이라는 가정은 진정으로 정상적일까?

내 부모는 이혼하지 않았지만, 부모의 싸움을 자주 지켜보던 내게는 죄책감과 고통이 가득했다.

그런 내가 가진 마음의 상처와

이혼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마음의 상처 중 상처의 중경을 어떻게 가릴 수가 있을까?


친한 지인의 가정은 겉으로는 완벽하다.

재벌 시댁과 안정적인 직장, 그들 안에서 잘 크고 있는 두 자녀. 하지만 부부는 각자 내연남과 내연녀가 있고 아이들은 가정부가 도맡아 키운다.

그들은 정상적인 가정인가? 이혼한 가정은 비정상적인 것에 반해, 그들의 가정은 얼마나 정상적인 가정인가?



세상에서 본인의 가정의 형태를 결정한 개인의 선택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

다만 내 생각과, 내가 중요시하는 가치관과 다름에서 나오는 각자 다른 선택을 할 뿐이다.

왜 사람들은 본인과 다른 대상에 대해 본인의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를 할까?

본인의 가치관이 옳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심리적 오만함은 나를 너무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매번 아이를 만날 때마다 너무 힘들다.

전 남편과 전 시모가 너무나 싫은데

아이 앞에선 그들을 좋은 사람들로 얘기해야 한다.

아동심리학으로 보면 아이의 자존감 형성을 위하여 아이는 본인의 양육자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있어야 한다. 적어도 아이가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는.

아이가 아빠와 할머니를 챙기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들의 생일에는 내 손으로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 가서 그들에게 줄 선물과 카드를 사서 편지를 쓰게 한다.

그런 시간들 덕분에 아직 어린 내 아이는 내가 아빠와 할머니를 좋아하는 줄 안다.

내게 아빠와 할머니 얘기를 여과 없이 얘기한다.

할머니가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게 힘들다고 얘기한다.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그런 주제에 난 항상 웃으며 대답해 준다.

공부는 해야 하는 것이니 할머니가 시켜주는 거라고,

세상에서 엄마만큼 널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라고.


많이 힘들다.

난 아이가 느끼는 아빠의 차가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특히 내 아이에게 그 여자를 변호할 때면, 너무나 힘들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도 어린아이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다.


내가 이렇게 버티며 이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를 알기에 되려 이혼 후 아이를 만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이혼 후 전 배우자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들도 이해한다.


같은 상황에서, 아이가 이혼한 배우자의 얘기도 못 꺼내게 하는 집도 있다.

이혼한 이후 전 배우자를 만나기도 싫어, 아이들과 연을 끊은 집도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들도 그런 선택을 할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아동 심리와 아이의 자존감에는 좋지 않은 선택이란 것을 알지만, 그것은 그들의 선택일 뿐이다.

감히 내가 그 선택과 방법에 대해 간섭할 수는 없다.

그들의 선택은 나와는 다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아이를 지키고,

나는 내 아이를 내 방식대로 지킬 뿐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간다.



요즘 나는, 이기적으로 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이혼 후 생긴 마음의 여유와 넓어진 이해심으로 과하게 타인을 이해해 준다는 이유다.

중간을 찾고 있고 중간을 찾아가는 과정인데도 기본적으로 에코성향이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스스로 꽤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맥은 가지치기를 하며 솎아내고,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은 잘라낸다.

이런 단호함이 이전에는 없었다.


나를 지키는 방법을 하나 둘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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