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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지아 Aug 10. 2021

남편과의 마지막

이혼의 결심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만났던 만큼

아이 아빠 또한 어렸다.

우리는 둘 다 순수했고,

많은 것들에서 처음을 공유했다.

학생시절부터 현재의 지위에 오를 때까지 함께 지켜봐 왔다.


그 사람은 나를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손을 놓지 않을 것을 믿었다.


사실, 우리에게 이별의 순간들은 있었다.

첫 번째는 결혼식 직전이었다.

결혼 준비를 하며 겪은 시어머니를 도저히 앞으로 가족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어 파혼을 요청했었다.

시어머니는 식장은 물론 청첩장부터 내 머리장식과 드레스까지도 본인이 직접 고르시며 주관하셨고, 아들이 나의 예쁜 모습을 보는 것을 질투하셔서 드레스샵에 아예 못 오게 하셨다.

또한 내가 시아버지께 안부전화를 드리면 질투하시고 드러누우시는 것을 시전 했다.

결혼 전 매일 시댁에 오라고 하셔서 매일 인사드리러 간 나를 세워두고 바닥 걸레질을 한 시간 반동안 하신 날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본 여러 여자들의 사례들을 비교하며 금전적으로 준비해 올 것을 요구하셨다.

신혼여행에 본인이 가라고 한 호텔을 예약하지 않았다고 친정어머니 앞에서 혼내는 것도 기본이었다.

결혼 직후부터는 남편과의 잠자리에도 본인의 매뉴얼을 지키길 강요하셨다.

전날 밤엔 함께 샤워를 하고, 붉은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잠든 후, 다음날 아침 7시쯤 해야 건강한 정자와 난자가 만날 수 있으니 그렇게 행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비난의 화살이 나에게 날아왔다.

정말 숨이 막혔다.

이런 문제들에 아이아빠는 현재 경제적 상황적 능력이 안되어 어머니께 의지하는 상황이라 이런 것이니, 결혼하고 나면 나를 이런 상황으로부터 꼭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나는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결혼을 강행했다.


두 번째는 결혼 후 2년 반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어머니 때문에 다툼이 잦아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자 너무 심적으로 힘들었다.

정신병이 있는 시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본인 와이프(전처)와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이 폭발했다. 모든 결혼과정이 우리 부부와 같아야 했고, 그 덕에 식장부터 모든 것을 우리와 똑같이 했다.

그에 대해 시어머니는 본인이 받는 스트레스를 전부 내 탓을 하며 원망하고 화풀이를 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시동생 때문에 힘드실 어머님을 생각해서 다 참았다.

시동생은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화가 나면 그 누구도 절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 사람에게 나는 제일 쉬운 먹잇감이었다.

손아래지만 말 한마디 대꾸 못하고 '네네' 하는 형수에게, 그는 많은 폭언과 폭력적 행동들을 일삼았다.

아이아빠는 시동생과 연을 끊듯이 했기에 아이아빠는 어려워했고,

당시 여자친구에게는 잘 보여야 했기에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민낯이었다.

시부모는 시동생의 분노표출이 본인들이 아닌 나에게 간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대신 겪어줌으로써 본인들이 겪어야 했던 폭언들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힘들었다.

시부모든 남편이든, <너만 참으면 모든 사람이 행복해>라며 나의 희생을 종용하는 현실이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기 전에, 서로 간에 좋은 감정이 그나마 남아있을 때 헤어짐을 제안했다.

내가 감히 부모자식 간 천륜을 끊는 것을 요청할 자신도 없었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떠나고자 했다.

나는 도저히 이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버틸 수가 없으니, 나 하나만 떠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아이 아빠는 우리가 아이가 생기고 정식적으로 온전한 가정이 된다면 어머니로부터 독립할 것을 약속했다.



우리는 난임병원을 다니며 아이를 만들었고,

시어머니가 변하길 바랐던 내 마음은 해가 갈수록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분은 바뀌지 않았고,

그분은 내 아이에 대한 교육관과 양육관까지도 통제하시며 힘들게 하셨다.

시동생네가 이혼한 다음부터는 우리 가족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졌다.


아이아빠와는 점점 사이가 안 좋아졌고,

이혼을 숙려 하는 단계까지 오게 되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시어머니께 간곡한 부탁을 드렸다.

는 정말 가정을 지키고 싶다고,

제발 저희 가정 그만 흔들어 달라고,

아들 둘 다 이혼시키셔야겠냐고,

우리 아이에게 행복한 가정을 주고 싶다고,

내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제발 그만해 달라고,

너무 힘들다고..


진심으로 애원했다.

나는 너무나 절실했다.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내가 힘들고 우리 가정이 힘들다는 걸

그분께 알려야 했고,

그분이 진심으로 아들의 가정을 사랑해 주시길 바랐다.


하지만 오히려 그분은

내가 그런 말들을 하며 본인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더욱 분노했고, 본인 잘못은 없는데 며느리가 할 말 다하며 본인을 모함했다고 분개하셨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고,

시어머니는 계속 드러누워계셨다.

나는 오갈 곳이 없었다.

더 이상 전진도 후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아이아빠는 말했다.


"너랑 어머니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난 어머니야. 네가 이게 싫다면 이 집에서 나가.

이 집이 얼마짜린지 알아?

네가 벌어서 이 집 살 수 있어?

난 이 집에서 무조건 살고 싶고, 이건 우리 부모가 해주신 집이니까 네가 부모님한테 무조건 복종해.

그게 싫다면 나는 우리 어머니한테 잘하는 여자 데리고 와서

이 집에서 앞으로 계속 살고 싶고, 네가 어머니께 그런 말씀드리고 상처드린걸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너와 살 수 없어. 난 어머니를 선택할 거야"



결혼하고,

5년 동안 벙어리 귀머거리로 살며

바보같이 어머니께 순종하다가,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 시부모 공경하다가,

이제는 이혼할 지경이니 어머니께 처음 진심으로 부탁드린 것이,

결국은 내 잘못이 되었다.

나는 아이아빠에게 고작 35억짜리 강남의 새 아파트보다 못한 존재였다.


무릎 꿇는 거, 왜 못하겠는가.

내 자식 지키고 가정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무릎 꿇고 사죄드리는 순간,

그때부터 사건은 마무리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며느리가 잘못을 인정했다는 명분으로

며느리를 질책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앞으로 얼마나 괴롭힐지를,

나는 너무나 알고 있었다.


사실 아이아빠 자체로도 많이 버거웠다.

성격적으로도, 남자로서도

같이 살아가기가 참 힘든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아이의 아빠라는 이유로,

그리고 순수하게 날 사랑해 줬던 그 시간들에 대한 인간적 믿음,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버텨왔다.


그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 사람의 입에서 지속적으로

내가 아닌 엄마를 택하겠다는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그런 말을 듣고자

온갖 모진 시집살이 겪고,

정신병 있는 시동생 견디고,

남자로서 문제 있는 사람과 아이를 만들기 위해

난임병원까지 다니며  이 사람과의 가정을 일구려 노력한 것인가.

그 사람과 살기 위해 여자로서의 삶은 평생 포기하기로 결심했던 것인가.

난 무엇을 위해 그토록 노력해 왔던 것인가.



나에게 사랑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렇게도 따뜻하고 밝았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이 다 물거품 되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이혼을 결심했다.

결혼한 순간부터 나는 최선을 다해 매일 살아왔다.

아이아빠에게도 그랬고,

시부모에게도 그랬다.

그랬기에 그들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고 더 한 것들만 요구했다.

10을 잘하다 1을 못해도 그간 10을 잘 한 것들에 대한 비교와 함께 더 큰 질책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내 노력을 알 거라고 믿었던

남편이라는 사람의 배신.

그 사람은 결국 어머니의 그림자에 가려

날 보고 있지 못했다.


사랑에 대한 상처와 함께

사람에 대한 상처를 너무나 크게 준 사람들.


현재, 시어머니의 연락을 받지 않는 것이 감사하고,

그 분과 더 이상 엮이지 않는 지금이 감사하다.

결혼 준비과정부터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도무지 못 버틸 것 같다는 예상이 들었다.


결국 이런 비극적 결말을 예상했었던 것이다.

바보처럼,

어렸기에,

알면서도 뛰어들었고

이제야 나올 수 있었다.




결국 끝이 정해져 있던 결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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