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등갈비찜

by 떼구르르

퇴근하고 오니 부엌에 큰 솥이 두개나 올려져 있었다.

짜잔. 미역국이다. 아, 동생 생일이구나.

짜잔. 김치등갈비찜이다. 와, 감탄스러운 모양새를 참을 수 없었다.

아직 뜨끈하고 김이 모락모락나는 게, 만든지 얼마 안 되었나보다.

엄마는 힘들겠구나. 내가 엄마에게 감정적으로 지쳐 벽을 쌓고 있는 중에도 엄마는 엄마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하고 있다. 내가 반찬이라도 만들면 힘든 게 덜할까. 그러면 이제서라도 엄마에게 여유가 생겨 우린 정서적 유대를 쌓을 수 있을까.


우리 엄마는 내게 항상 쏟아낸다. 중학생 때 나는 엄마에게 아빠의 험담, 시댁에게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통장을 뒤적이며 돈이 없다는 푸념을 들어야 했다. 가끔은 싸우고 못살겠다고 박차고 나간 엄마를 찾아 나가 위로해야 했고, 죽어버리겠다는 엄마를 말려야 했다. 지금은 회사동료 이야기를 듣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자식이 결혼하며,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자식의 며느리가 어떤 사람인지 듣는다. 그 사람 살이 너무 많이 쪘더라, 그 사람 그 옷이 어때 보이더라, 엄마 주변을 향한 품평이 끊이지 않는다. 동시에 엄마 자신을 향한 품평도 이어진다. 주름살이 많아지지 않았냐며, 너무 마르지 않았냐며, 혹은 너무 눈가가 쳐지지 않았냐며, 혹은 새치가 너무 많이 나지 않았냐며,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을 흘려보내지 않고 내게 쏟아낸다. 그리고 품평의 마지막 대상은 나다.


누군가의 인생은 기구하다.

그는 저 멀리 지방 산골짜기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7남매 중 다섯 째로 태어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계집애들이 공부하는 건 사치여서 공장에서 일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연히 대학교는 갈 수 없었다. 나이차 많이 나는 남자친구와 연애했다. 부모에게 받아보지 못한 다정한 사랑이었다.

첫째를 가진 채로, 엄마에게 축복받지 못하는 결혼식을 올리고, 제사가 일년에 족히 열 번은 되고 별볼일 없는 집안에서 육아와 가사일을 하며 이십대 중후반을 보냈다. 이렇게 살다간 돈을 못 모으고 시집살이만 하게 될 것 같아 없는 살림에 어린 아이 둘을 쪼르르 달고 독립한다. 그 집은 조금 추우면 수도가 얼었다. 돈이 없어 돈까스 하나 시켜서 아이들 먹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인형 눈알 박는 부업, 제품 조립하는 부업, 베이비시터, 식당, 무엇이든 했다. 돈을 모아 조금 더 나은 동네에 조금 더 집다운 집으로 이사갔다. 남편이 술만 마시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술마시고 오면 평소에 부리지 않던 성질을 마구 부린다. 그놈의 돈이 문제란다. 이혼해버리고 싶은데, 아이들 때문에 살았다.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목을 맬까, 불을 낼까, 여러밤 고민했다. 어떤 기회로 남편이 멀리, 오래 출장을 다녀왔고 그 뒤로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젠, 시아버지가 치매다. 남편은 장남으로, 치매인 아버지를 모시고 반쪽짜리 집을 물려 받았다. 치매환자를 간병하는 일은 모두를 시들게 한다. 우리 모두 말라갈 때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뒤로 남편의 형제들은 왕래가 끊겼다. 아버지의 재산 덕에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갔고, 아이들은 다 커서 성인이 되었다.


엄마는 살아냈고, 키워냈다. 죽지 않음에 감사하다. 그래서 노력했지만, 엄마가 치열하게 우리를 키운 만큼, 딱 그만큼 나도 치열하게 지쳤다. 이이상으로 엄마의 통제와 고집을 받아주는 건 어린 시절 나에게 못할 짓이다. 엄마의 선택은 엄마의 인생이다. 엄마의 선택이 내 인생까지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도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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