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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번 역은 '환승'입니다

by 마음의 온도

'그와 헤어지기로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사회라는 버스에 올라타고 몇 정거장쯤 지났을 때였다.

친구들 중에 조숙했던 완숙란 아이들은 고등학생 때 첫 입맞춤을 고백했고,

조금은 덜 익은 반숙란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 그와의 첫 키스를 무용담처럼 떠들었다.

나는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선생님이 읽어주는 수기처럼 그 이야기를 들었다.

"달콤? 몽롱? 그 느낌은 어떤 맛일까?"
가슴은 쿵쾅거렸지만, 나는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아직 내 삶은 미지근한 반숙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MBTI는 인티제, 날카로운 T지만, 그는 언제나 따뜻했다.

방송국 막내작가 시절, 눈물은 햇빛 쨍한 날 건조대위에 눕혀놔도 마르지 않았고,

맨 정신임에도 다리는 지그재그 갈지자를 그리며 방송국 복도를 허둥댔다.

나는 삶이라는 레시피아래, 뜨거운 물속에 던져진 날달걀이었다.


따뜻함이 그리웠고, 홀로 지새우는 밤이 외로웠으며, 흐릿한 눈동자를 고정시켜 줄 힘이 필요했다.

그는 한결같았다.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주었고, 밤샘 원고를 쓸 때면 밤새 곁을 지켜주었다.

원고를 쓰다가 정체구간을 만나면 키보드 위의 내 손은 그의 몸으로 향한다.

그와 입맞춤을 한다.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흩어진 한 바구니 레고조각들이, 자체 테트리스처럼 맞춰지고,

머릿속이 싹싹 긁어먹은 빈 밥통이었는데 그와의 키스는, 뽀얀 김이 오르는 이천 쌀밥이 지어졌다.


그는 사랑 그 이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를 만져야 했고, 어디서든 내 손은 그를 잡고 있었으며,

매일 밤을 그와 함께 지새웠다.

그렇게 1년, 10년, 20년.., 이제 그와 헤어지려고 한다.



"커피는 절대 안 됩니다."


슬기로운 의사들의 단체의상, 파란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단호하게 말한다.

너무도 충격적인 뉴스에는 놀라지 않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지며, 내가 집에서 입는 츄리닝과 비슷한 의사 복장에 괜한 불만이 나온다.

'수술도 하지 않는 동네 이비인후과 의사가 웬 수술복이람. 하얀 가운은 캐롯에 팔아먹었나?'


며칠 전부터 콜록콜록 기침이 나왔다.

감기인 줄 알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진통제를 먹었지만 콜록은 쿨럭으로 바뀌었고,

자다가도 기침이 튀어나와서 몇 번이고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보지 않아도 노란색일 것 같은 무언가가 거꾸리를 하는 듯했다.

불안함이 밀려왔고, 바로 동네 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단명 : 역류성 후두염.

슬기로울 파란 스머프 의사는 원인 따위는 알 필요 없다며 세 가지 명령을 내린다.


첫 번째는 유산소운동보다 근력운동을 늘려라.

왜? 마음에 근육을 키우는 게 유행이니까 이젠 목구멍에 근육을 키우라는 건가?


두 번째는 먹고 바로 눕지 말아라.

그건 다행이다. 한우가 되어서 먹힐까 봐 먹고 눕지는 않는다. 다만 맨 정신일 때만.


세 번째가 문제다. 커피는 절대, 한 모금도 안 된다.

먹고 누워도, 유산소운동만 해도 어찌어찌 봐줄 수 있지만, 커피는 안 된단다.

"지금부터 무조건 커피는 안 됩니다. 한 모금도!"


그와의 이별을 상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언젠가라는 예감은 현실이라는 직감이 되었다.

위장에 대패질을 하듯 쓰릴 때는 헤어져야지 했다가도, 각성이 필요한 밤에는 결심이 무너졌다.

하루 몇 잔의 커피는 조기사망률을 낮춘다잖아, 혈당 조절능력을 높인다잖아~ 라며 희망고문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당뇨병은 막아줄지언정,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주변에서 왕따가 될 수도 있다.

조기사망률 허들을 넘겨 오래 살아도, 하루에 5잔씩 커피를 들이켜는 할머니는 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달랐다.

언젠가는 슬기로울 스머프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커다란 느낌'이 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선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거금 들여 쿠폰을 사지 말았어야 했어.

이별을 결심한 여자에게는 본전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서프라이즈를 한다며 퇴사선물을 한 네스프레소씨에게 이별 인사를 한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별다방 아메리카노씨는 직접 보고 이별통보를 할 자신이 없다.

유리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분위기 파악도 못한 채 크레마를 뿜어내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잘 가, 나의 사랑'



이별의 정거장에서 환승을 하다


그와 헤어진 다음 날, 둥근 해는 떴지만 눈이 떠지지 않는다.

습관처럼 주방으로 향하다 멈췄다. 책상, 주방, 카페- 그의 흔적이 있는 공간은 모두 피했다.

침대에 눕는다. 그와 함께 하지 않는 공간은 여기뿐이다.

하지만 침대 밖은 위험하다고 하루 종일 송장자세로 있을 수는 없다.

손이 허전하고, 뇌에서는 카페인 엥꼬표시가 깜빡거린다.

특히 글을 쓸 때면 한 손이 허전했고, 입술이 타들어갔다.

각성하지 않는 뇌는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며 빈자리를 인질 삼아 협박까지 한다.


20여 년간 채워주었던 옆자리를 채워야 했다.

이별의 정거장에서 '환승'을 하기로 한다.

새로 갈아탄 그는 익히 좋은 인성과 투명한 성격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 캐릭터다.

그의 이름은 '생수'씨다.


그렇게 시작된 생수씨와 동거. 생수씨를 만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부터. 밤사이 자리 잡은 세균들을 없애고서야 만날 수 있었다.

급한 마음에 양치 전 그와 함께 하면 안 된다. 덕분에 깨끗한 새나라의 아줌마가 되었다.

반반치킨의 기법으로 온수와 냉수를 한 몸에 담아 천천히 음미하듯 넘긴다.

투명하고 바른 성격이지만, 역시 그런 캐릭터는 맛이 없는 법.

그와의 건조한 동거를 생산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가족계획을 하기로 한다.


계획 : 하루 2리터 생수씨 흡수하기


쓰리스타 휴대폰의 헬스앱을 열어 목표를 정하고, 생수씨와 한번 할(?) 때마다 체크를 한다.

하루 250ml씩 8번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처음에는 250ml가 한 번에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맥주씨라면 500ml 원샷도 가능했지만 생수씨는 목 넘김이 부드럽지 않다. 살몬도 아닌데 역류한다.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습관의 힘을 믿기로 한다.

동거 2주쯤 되니 250ml 원샷이 가능해졌고, 연속 두 번(?)도 가능해졌다,

3주쯤 되었을까.

그를 흡수한 지 2시간쯤 되었을 때 몸에서 반응이 시작되었다. '생수씨 생수씨 목이 말라요~'

기상 후 1번, 운동 후 2번, 하루 두 끼 식사 후 2번, 오후에 2번, 취침 전 1번,

하루 8회의 만남은 쉬워졌고, 어떤 날은 10번도 넘게 만난다.

8번의 만남이 성사되면 헬스 앱화면에서 폭죽과 함께 팡파르가 터지는데, 워터가즘이 오른다.



빰빠라밤~ 축하음과 함께 터지는 폭죽 도파민



새로운 환승역에서
새로운 동행을 만나다


무직자의 점심은 늘 혼밥이다.

오랜 루틴에 익숙한 배꼽시계는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알람을 울린다.

어제 끓인 국이 있으면 국밥으로, 한식 다음날은 분식이지- 라면봉지를 뜯고, 사놓은 빵이 있으면 조촐하게 커피 한잔과 브런치를 준비한다.

하지만 아메리카노씨가 없는 브런치는 이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생수씨가 좋은 분이지만 갓 구운 토스트에 생수씨 조합, 이건 아니다.


그때 나타난 어린 시절 친구, 밀크씨.

밀크씨는 뽀얀 피부값도 못하고 내 속을 뒤집어 궁합이 안 맞는다.

하지만 생수씨에 식빵을 적실수는 없으므로, 이혼숙려캠프에서 조언한 대로 재결합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어차피 출근도 안 하고, 사무실도 아니니 유당불내증으로 폭풍이 몰려와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웬일?

밀크씨가 부드럽다. 이렇게 고소했었나. 브레드씨와도 대화가 잘 통한다.

이별의 정거장에서 생수씨로 환승을 하고, 새롭게 만난 동행자는 내 속을 뒤집었던 그가 아니었다.


25년 4월 22일 병원 앞 정류장에서 그와 이별을 한지 두 달째,

그와 이별은 끝이 아니었다.

세상 투명한 그와, 세상 뽀얗고 부드러운 그를 알게 해 주었다.


독수리술도가 막걸리 아님





며칠 전 이비인후과에 정기진료를 위해 다녀왔다.

오늘도 역시 파란색 스머프 의사는 질문으로 인사를 한다.

"커피, 드셨어요?"

"아니요."

"한 잔 두요?"

"네! 한 모금도요!"


어디 좀 보자며, 거짓말이면 맴매를 할 포즈로 후두 내시경을 한다.

이것 봐라. 진짜네~ 투털이 스머프 의사의 입꼬리 한쪽이 비대칭으로 올라간다.

약 처방 없는 빈손으로 병원을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다른 때 같으면 1층 커피숍에 들러 습관적으로 아메리카노씨를 모셔와 안고 있었을 텐데.

절대 헤어질 수 없는 '그'였는데, '그'와의 이별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새로운 '환승'은 기대 이상이었다.



인생은 환승의 연속이다


어쩌면 나는,

내 인생에서 '환승'이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멈추면 끝이라고, 여기서 내리면 갈 데가 없을 거라고,

그래서 나의 '일'과의 줄다리기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신발 밑창을 콘크리트 바닥에 긁어대면서 버텼다.

내 손이 까이고 손마디에는 물집이 잡히고, 발바닥에서 튀는 스파크도 무시했다.

그러다, 내가 먼저 줄을 놓아버렸다.

맞은편에서 당기고 있는 '일'이라는 손이 먼저 줄을 놓을까 봐.

놓은 줄에 뒤로 자빠져서 뒹굴까 봐. 창피하게.

그렇게 나는, 일이라는 버스에서 하차를 했다.


이별의 정거장은 또 다른 '환승역'이었다.

다시는 못 쓸 것 같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노라고. 뒤도 안 보고 돌아섰는데,

새로 갈아탄 버스의 노선은 '작가행'이었다.

다시 글을 쓰며 나를 정리할 시간을 선물 받았다.

새 학년을 맞이해 새로운 교실에서 새 짝꿍과 어색한 친분을 터 놓듯,

나의 환승은 새로운 세계로 안내를 해주고 있다.


혹시,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울고 불며 매달리고 있는가.
이 일 아니면 안 된다고, 자존심인지 자존감인지 돌림자를 쓰는 형제들과 싸우고 있는가.

혹시라도,
내가 아파하고, 내가 다치는 것을 알면서도
헤어짐의 두려움에, 이별 후의 막막함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는가.


아직 그 줄을 놓지 못한 누군가가 있다

발바닥이 닳고 손마디가 갈라져도.. 버티고 있다,

그 마음 내가 너무 잘 안다.

그렇기에 조심스레 권해본다.


환승이란 끝이 아니라, 잠깐의 멈춤일 뿐이다.

잠시 숨 고르고 나면,

우리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지금이 막다른 골목길 같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 골목 어귀를 돌아서면 분명 새로운 길은 열린다. 막다른 길이면 돌아 나오면 된다.


아닌 것 같다면,

너무 힘들고 괴롭다면,

당신이 지금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환승 카드를 누르고 새로운 버스에 올라보는 게 어떨지.

"이번 역은 환승입니다"

.

.

.

.

.

환승 버스에 앉아있던 온도씨가 창문을 연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온도씨가 소곤거린다.


"갈아타길 잘했어. 이렇게 바람이 간지러운 손길이었다니.

이번 환승역에서는 내리지 말자. 일단 가보는 거야. 오라이~"



삶은 끝없는 환승의 연속이다.


같은 길 위에서 다른 마음으로,
다른 길 위에서 같은 나로.


환승은,

나를 다시 태우기 위한 '잠시의 정차'였다.

부디, 당신의 여정도

따뜻한 환승으로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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