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를 보지 않는지는 꽤 오래되었다. 집에 티브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거실에는 벽 한쪽을 꽉 채우는 대형 티브이가 걸려있다. 몇 년 전 언니와 형부가 구입한 것이다. 둘은 티브이를 들이고는 만족스러워했다. 큰 화면으로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작은 집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검은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딱히 불만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티브이는 벽에 걸려 있어서 실제로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지 않았거니와 나는 원래도 방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거실에 어떤 티브이가 있건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노트북이나 태블릿 PC, 스마트폰을 통해 영상을 봐왔고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방에 티브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근래 들어서다. 딱히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좀 편하게 영상을 보고 싶었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노트북으로 두 시간짜리 영화라도 볼라치면 허리가 아팠다. 작은 화면도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거실에 나가 티브이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방에서 혼자 볼 수 있는 티브이가 필요했다. 내 방은 무척 협소하여 최소한의 가구를 제외하고는 들여놓지 않는 게 상책이지만 벽걸이 티브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티브이를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말 아침 일찍 혼자 가전제품 매장에 갔다. 마침 블랙프라이데이 주간이라 티브이가 큰 폭으로 할인하고 있었다.
전시되어 있는 티브이들을 둘러보면서 방에 걸기 적당한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았다. 사십 인치가 적당해 보였다. 매장에서 팔고 있는 사십 인치 티브이들은 죄다 처음 보는 브랜드를 달고 있었다. 점원에게 삼성이나 엘지에서 나온 사십 인치 티브이가 없냐고 물어보았다. 점원이 말하기를 요즘 삼성과 엘지에서는 화면이 큰 고급형 티브이를 주로 생산하고 작은 사이즈의 티브이는 잘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산 저가 티브이가 쏟아져 나와서 가격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생소한 상표의 티브이들은 죄다 중국의 전자제품 회사가 만든 것이었다.
고작 사십 인치 티브이 하나 사면서 삼성, 엘지를 찾는 내가 답답했는지 점원은 현시점 중국이 티브이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를 설파했다. 가격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쌌다. 나는 그런 시류를 전혀 몰랐다. 문득 옛날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일제, 미제가 최고라고 하던 것이 떠올랐다. 가전제품은 무조건 삼성, 엘지를 외치는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점원은 친절했다. 비록 중저가 티브이 하나를 구입하려는 고객이라 할지라도 옆에 붙어 서서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 4K가 어쩌고 패널이 어쩌고 하는데 기계치에 영어 실력도 그닥인 나로서는 내용의 절반도 알아들을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나는 점원이 추천해 준 이백불 언저리의 중국산 티브이를 사기로 결정했다.
계산을 끝낸 티브이를 받아 들면서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40인치 티브이 상자는 크기가 꽤 컸는데도 여자 혼자 가뿐히 들 정도로 가벼웠다. 저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들고 가나 직전까지 하고 있던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다.
세상 참 좋아졌네. 티브이가 이렇게 가볍다니. 옛날에 티브이를 옮길 땐 꽤 무거웠는데 말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내가 늙은이 같이 느껴졌다. 세상과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에 한참 뒤처진 채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 같다.
혼자 티브이를 들고 매장을 걸어 나오면서 뿌듯했다.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이제는 뭔가를 살 때 누군가의 허락을 맡거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나는 성인이고 티브이를 살 돈도 있으며 비록 작은 골방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뭔 짓을 한들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자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다. 기분이 묘하게 좋았고 해방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약간 혼란스러웠는데 매장 안에서 티브이를 고를 때 느낀 '늙었다'는 기분과 티브이를 사들고 나올 때 느낀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은 어쩐지 상충되고 조화롭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 어른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늙어버린 상황이라니. 이 현상은 이율배반적이고 공정하지 못하다.
집에 와서 티브이를 벽에 걸어주는 월 마운트(Wall mount) 업체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캐나다에서는 한국처럼 가전제품을 사면 배달과 설치까지 한 번에 해결되는 서비스를 기대하긴 어렵다. 며칠이 지나 업체에서 사람이 와서 티브이를 벽에 달아주었다. 전선도 벽 안으로 말끔히 넣었다. 티브이는 마치 액자처럼 가뿐히 벽에 걸렸다. 좁디좁은 방에 티브이를 들였건만 하나도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딱 하나 불만이 있다면 이백삼십 불 주고 산 티브이를 벽에 다는데 이백육십 불을 지출했다는 점이다. 이 나라는 인건비가 비싸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침대에 눕거나 기대어 앉아 티브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노트북이나 스마트 폰의 작은 화면이 아니라 40인치 화면으로 보게 되었다. 불편한 책상 의자에 오래 앉아 있을 필요도, 손목 아프게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딱히 뭔가를 시청하지 않을 때에도 눈 오는 장면이나 바닷가 풍경을 화면에 띄워놓는다. 그럴 때면 티브이가 꼭 창문 같고 바깥으로 실제 그런 풍경이 펼쳐지는 듯하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는 모닥불 피우는 벽난로 영상을 켜 놓는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흘러나오면 방안은 금세 아늑해지고 어쩐지 공기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는데, 나는 아주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십 인치 중국산 티브이에도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에 무척 안도했다.
그래. 이 정도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자.
작가가 되겠다거나 남다른 삶을 살겠다 설치지 말자. 나는 이 욕심 때문에 내내 불행했다.
그냥 개인 티브이를 갖게 된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자.
방에 티브이를 다는 데 티브이값보다 비싼 설치비를 여유롭게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됐다.
침대에 누워 티브이를 보면서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