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서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에, 늘 그런 종류의 연결고리를 맺지 않으려고 애썼다.
타국에 살면서는, 타인과 거리를 두기 위한 자발적 노력이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이민을 고려하면서 이 점은 기대한 바 없지만, 어찌 보면 상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낯선 땅에서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고, 스치듯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외출이라 해봤자 학교와 직장을 제외하면, 필요한 물건을 사러 마트에 가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정도가 되었다. 한동안은 이런 상태가 꽤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문제는, 어떤 사안이든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발생한다. 아무리 혼자 있기를 즐기더라도 결국 나란 인간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불필요한 관계들이 성가셨을 뿐이지, 무인도나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방 안에 틀어박힌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교와 직장에서 가까워진 동료들이 생겼으나 같은 직종에 종사한다는 점 말고는 다른 겹점은 없었기 때문에 대화는 늘 피상적이었다. 언어적 한계와 문화의 차이 역시 큰 장벽이었다.
이곳에서는 마음을 온전히 터놓을 만한, 본질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상대를 찾기가 훨씬 어려웠다.
더구나 고립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타의에 의해 맞이한 반강제적 국면이라면, 어쩐지 반항심마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외로웠다. 세상의 중심에서 한없이 밀려난 기분이 들었고, 나를 둘러싼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 망망대해 위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쓸쓸했다.
그쯤 되면, 마침내, 글을 쓰게 된다.
이 나라는 글쓰기에는 꽤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대지는 광활하여 어딜 가나 인적이 드물고, 사방이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 낯선 언어는 알아들으려면 매번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하지만, 같은 의미에서 신경만 끄면 그저 의미 없는 백색소음처럼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여기서는 물리적으로 완벽히 고요해질 수 있다.
이처럼 모든 현상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이민 생활의 애로사항이라 할 만한 몇몇 특이점이 글을 쓰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도움이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쓰는 삶을 동경해 왔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책상 앞에 진득하게 앉아지지가 않았다. 딱히 주체가 없는 분주함과 초조함을 핑계 삼아 이런 상태로는 도무지 쓸 수 없다고 둘러댔었다. 그런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글쓰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한편으로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루하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하루를 버티기 위해 쓰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쓴다. 누군가에게는 꼭 털어놓고 싶은 마음속 이야기를 글에 담는다.
그리고 그런 내 곁에, 브런치가 있었다. 사실 브런치의 존재는 나의 글쓰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방구석에서 혼잣말처럼 끄적인 글들이 클릭 한 번이면 날개를 달고 너른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게 되었다. 이제 물리적 공간과 거리는 의미가 없어졌고, 내가 어느 나라에 머물고 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른 무엇보다 독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마음의 결이 닮은 사람들이 찾아와 공감해 주고, 댓글로 응원을 남겨 주고,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건네온다.
누군가로부터 이해받는다는 기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게으른 나를 다시 책상 앞에 앉히고 글을 쓰게 만든다. 그리하여, 내가 그토록 꿈꾸던, '쓰는 삶'을 살게 되었다.
고립은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있으나, 이제는 외롭지 않다. 혼자여도 고립되지 않는 세상을 브런치가 내게 가져다주었다.
지금처럼, 나와 비슷한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와 글로 연결되기를.
내가 그랬듯, 그에게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세계가 펼쳐지기를.
브런치에서 시작한 이 꿈을 더 멀리 보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문장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