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로켓은 발사대에 얌전히 서서 분홍색 불길의 구름과 오븐 같은 열기를 뿜어냈다. 차디찬 겨울 아침에 우뚝 솟은 채로, 강렬한 열기를 내뿜어서 여름을 만들었다. 로켓이 대지에 선사하는 짤막한 여름이었다…… p.24
책을 만나기까지
레이 브래드버리를 만난 건 <화성 연대기>로 벌써 3번째다. 디스토피아 작품들을 순서대로 접하다 <화씨 451>을 읽고는 '디스토피아를 서정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구나'라고 느낀 뒤로 그의 작품을 펼칠 때마다 어떤 냄새와 색채가 펼쳐질지 기대를 하게 된다. <민들레 와인>은 어느 계절에 읽건 첫 페이지와 함께 여름이 시작되고 마지막 페이지와 함께 여름밤이 지나간다.
화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두 가지의 얼굴이 다가온다. 과학적 사실로서 무정하게 우주에 떠있는 행성은 그 무정함만큼이나 어떤 생명도 품지 않겠다는 듯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 행성으로서 우리에게 상상력을 불어넣고, 또 그 상상력을 다시 끌어안는 적갈빛 행성이다.
원래는 화성을 배경으로 할 뿐 이렇다 할 접점이 없는 단편들을 편집자의 제안으로 하나의 시공간 배경으로 묶어 낸 '픽스 업' 소설인 이 책은 주인공이나 중심인물이 없다. 이전 장에서 나온 인물이 나중에 다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들의 서사나 스토리는 모래처럼 독자의 기억에서 금방 날아간다. 왜냐면 이 책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화성이니까.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행성
<화성 연대기>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책은 정작 화성인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는다. 화성인들의 문명은 이미 쇠락의 끝자락에 걸쳐 있고, 지구인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문명의 흔적만 남아있다. 탐험대원과 이후의 이주민들이 화성의 버려진 외계도시와 신전을 배회하지만 인간의 그림자만 돌아다닐 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빈 집이나 버려진 가게 또는 폐건물에 가 봤거나 들여다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닥이나 구석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서류와 쓰레기를 보며 우리는 그곳이 처음부터 비어있던 황량한 공간이 아니라 한 때는 삶이 있던 곳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 지점에서, 버려진 사물들과 흔적과 마주하는 순간부터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시간의 수평축의 한쪽 끝에는 텅 빈 현재가 있고, 반대편 끝에는 모든 것이 자리에 맞게 들어차 있던 과거가 서로 시간을 거슬러 교차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그곳에서 사람들이 나눴을 말과 행동의 흔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지만 시간의 장벽을 뚫지는 못한다.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다. 비어버린 수족관을 보며 유리 너머에 어떤 물고기가 헤엄치고 다녔을지 상상해 보듯.
그래서 이 책은 상상에 기반한 과학소설이고, 1950년 당시의 기준으로 미래를 배경으로 써 내려갔음에도 마치 누군가의 과거를 돌아보듯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뒤섞여 있다는 느낌을 준다.
화성인과 지구인, 흑인과 백인
이야기의 대부분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가 지구에서 화성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마치 역사책으로 보듯 시간순으로 펼쳐진다. 화성에 처음 발을 내딛다 사고로 사라진 탐험대원들, 산소가 부족한 화성에 나무를 심겠다는 소명을 찾는 이주민,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마음의 안식을 주기 위해 화성으로 향하는 종교인, 한적한 고속도로에 주유소를 열고 말년을 즐기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과 꿈을 안고 화성에서 살아간다.
화성인들은 인류와 조우하지만 그들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다. 정신 감응 능력이 높은 화성인들에게 지구인의 도착은 불쾌한 경험 또는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상식 밖의 영역이다. 화성인들에게 지구인은 외부에서 온 불청객일 뿐이다. 독자인 우리는 화성인들의 이기심과 무관심 그리고 그들의 적의를 이해하지 못하며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화성인의 처지를 지구인과 바꾼다면 우리의 반응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구에 어느 날 외계에서 날아온 존재들이 찾아와 내 정신과 마음을 뒤흔들고, 자신들이 외계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하며 다가온다면 그들의 도래를 두 팔 벌리며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나라, 다른 대륙, 다른 문화에서 온 구성원을 언제나 환영하는 존재들인가? 지구의 인간들이 각자 스스로 만들어낸 한계와 제약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오고 번성했듯, 화성인들에게는 마찬가지로 자신들만의 삶이 있다. 그것이 잘못되었건 아니건 그렇게 선택하고 살아갈 권리가 화성인에게도 있다.
이 책에는 화성인을 근거 없이 혐오하는 한 정착민이 나온다. 그의 모습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영국인과 다를 바 없음에도 화성인들에게 오히려 꺼지라고 하거나 적으로 대하며 위협한다. 한편 다른 챕터에서는 백인중심의 미국 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얻고자 화성으로 대규모 이주를 하는 흑인들이 나온다. 화성인들은 지구인을 멸시하고, 백인은 흑인을 무시하고, 정착민은 화성인에게 내 땅이니 꺼지라고 한다. 이 순환의 배척에서 지구인과 화성인의 구분 또는 흑인과 백인의 구분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밀어내는 동일한 인간이고, 또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거부당하는 존재이니까. 우리는 화성인이다.
화성의 박자
<화성 연대기>는 박자가 있는 책이다. 지구와 화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짧은 장이 있고 그 이후에 화성에서 살아가는 어느 인물의 구체적인 삶을 묘사하는 긴 내용이 이어지는 구조다. 한 사람의 긴 인생의 호흡을 읽으며 숨 가쁘게 달려왔으니 잠시 쉬라는 작가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그 박자를 따라 독자는 우주의 시선에서 화성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내려다본다.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등장했으며, 어디에서 전투가 일어났는지를 역사책 보듯 읽는다. 그러다가 개별 인물들의 이야기로 넘어오면 그 자리와 그 시간으로 이동해 내 옆집의 화성 정착민 이웃을 지켜보는 시선으로 위치가 바뀐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정치적 격변, 군사와 전쟁, 문화와 경제의 흐름으로 접한다. 하지만 과거에 살았던 개개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순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갔다.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개척하고 살아간 자들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의 꿈과 소망은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단지 살아가기 위해, 누군가는 부족한 것이나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누군가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 화성에 방문한다.
시간 순서에 따라 연대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들의 일화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억에서도 희미해진다. 사람이 뿌리내리고 살 수 있는 화성이 되기까지 무수한 이들의 노력과 고뇌가 있었지만 그들의 개별적 삶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지만 그 역사를 구성한 수많은 개인들의 더 작은 역사와 과정을 보지는 못한다. 눈앞의 운하로 강물이 흘러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냇물과 샘물이 있었는지 추측할 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운하 덕에, 운하로 흘러 들어온 지류 덕에, 개별적인 인간들의 분투 덕에 화성인이 사라져 가는 불모의 땅은 인간을 품고 다시 생명의 행성이 된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을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화성에 나무를 심던 이도 있었다. 그 나무는 자라고 또 자라 숲이 되어 화성인들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미래의 이주민들 중 누구도 그들보다 앞서 존재했던 개척자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화성에 심어진 나무에서 그 존재를 매순간 어렴풋이 느낄 것이다. 이곳에 누군가가 있었으며, 그의 시간이 지금 우리와 교차하고 있음을. 삶을 그 자체로 살아가기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한 생명은 계속 이어진다.
글토막
"전부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사용했던 모든 것들이. 그들이 이름 지은 모든 산이.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사용할 때마다 거북함을 느낄 겁니다. 산의 이름은 아무리 애써도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들리겠지요. 물론 우리가 새 이름을 주겠지만, 옛 이름은 세월에 묻힌 채 남아 있을 테니까요. 이곳의 산들은 그 이름으로 형체가 잡히고 사람들의 눈길을 받아 온 거니까요. 우리가 운하나 산이나 도시에 붙이는 이름들은, 하나같이 오리의 등에 뿌린 물처럼 미끄러져 떨어질 겁니다. 아무리 화성을 매만져도 우리 손길은 그 본질에 닿지 못할 겁니다." p.1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