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계획하는 것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의 차이
"측량 일을 하면서 나침반을 보는 법을 배웠는데, 항상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정북향을 가리키죠. 하지만 나침반은 우리가 북쪽으로 가면서 마주칠 늪이나 사막, 절벽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아요. 무작정 목적지로만 향하다가 늪지대에 빠져버리면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영화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신뢰에 대하여 말만 하는 것은 신뢰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보다는 실제로 존재하고 지금 여기서 활동하며 작용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을 말하도록 하라.
<자기 신뢰>, 랄프 왈도 에머슨, p.41
마주하기 싫은 것들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 덮어둔 채 잊고 싶지만 언젠가는 해결해야 하는 사건들도 있다. 일상뿐만이 아니라 일에 있어서도 그런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회계팀은 마감과 회계결산, 감사대응 외에도 관리조직으로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회계는 어느 조직에서나 절차상 마지막 단계에 있기에 다른 부서들이 창출해 낸 가치, 수행한 업무의 성과, 투입된 비용 대비 수익 등 여러 정보를 취합하기에 유리하다. 재무적/비재무적 정보들을 통해 조직의 병목구간을 파악하고 회사의 재원이 적절히 활용되고 있는지 추적하고자 하면 그때부터 재무기획, 재무관리, 경영기획 등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회계팀이 결산/감사대응 외에도 기획과 관리 업무를 같이 떠맡을 수도 있고, 조직이 세분화되면 별도의 기획부서를 신설하기도 한다. 어떤 조직 구조와 체계를 운용하건, 회계팀에서는 피해 갈 수 없지만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단어가 있다.
"회계팀에서 추정 재무제표 좀 작성해 봐."
숫자에 담긴 권력 - 의지를 품은 숫자
추정이란 말이 들리면 마음이 심란해진다. 회계의 시간 감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반면, 추정은 단어 그대로 미래에 존재한다. 회계에게 과거는 '실적'과 동일한 말이다. 실적은 곧 사실이다. 파편적으로 이곳저곳에서 이미 발생한 경제적 사건을 숫자와 분개, 전표라는 단일 창구를 거쳐 재무제표라는 현재에 예쁘게 그려 넣는 것이 회계팀의 일이다.
어느 부서나 마찬가지지만 회계도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재무제표와 그것을 구성하는 숫자들에는 근거가 되는 서류들, 담당부서와 결재권자들의 승인과 같은 확고한 증거물들이 있다. 반면 회사에서의 추정과 계획은 근거가 없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가정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가정들에는 상황에 따라 자의적이고, 측정 불가능하며 입증될 수 없는 욕망이 반영되기도 한다.
□□□□팀은 새로운 유형의 서비스를 고객에게 소개할 계획이다. 이 서비스를 통해 회사의 추가적인 매출이 기대되는데 목표 연간 매출액이 ○○억이다. ○○억이 어떻게 나오는 숫자인지 근거를 물어봤다. 컨설팅 업체를 통해 시장조사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받았는지, 아니면 우리 회사 제품과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들에게 설문을 진행했는지, 또는 유사한 시장이나 선두기업의 경험사례를 비교분석 했는지 등이다.
딱히 없었다. 물론 근거 자료가 전혀 없지는 않다. 임원에게 올라간 보고서도 존재한다. 하지만 숫자의 근거를 파고들다 보면 ○○억에 대한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는다. 보고와 기안서는 방대한데 그 목표 수치를 산출한 치열한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다. 일을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어떤 능력을 얻는다. 상대가 얼마나 진심인지 또는 노력하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는 능력이다. 어떤 파일 하나, 문서 하나를 열어보면 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또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담당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을지 직관적으로 보인다. 어떻게 하겠다는 야망에 대한 설명은 많았지만 그 야망의 크기를 품게 된 경위는 간략했다.
물론 관리부서로서 편하게 남의 노력을 검토하는 입장으로서, 감독의 작품을 앉아서 비평하면 되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보는 편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지갑에 있는 돈도 아니고, 나랑 관련도 없는 부서의 일에 일개 직원이 날이 선 시선을 들이댄다고 해서 특별히 득이 될 것도 없다.
경위는 이랬다. 숫자의 근거는 ◇◇◇본부의 임원이 던진 수치였다. 실무자들은 ○○억이라는 결과의 방향성에 맞춰 보고서를 만들었을 뿐이다. ◇◇◇본부의 임원은 왜 그랬을까? 이미 기획부서에서 목표로 한 내년도 사업계획 매출액에서 할당된 수치를 배정받았을 뿐이다. 그러면 기획부서는 ○○억을 어디서 뽑아냈을까? 위로 더 위로 올라가다 보면 관료제 조직의 의지의 기원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걸 모두 알 것이다. 이미 회사의 목표에는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의지가 개입되는 순간, 사실관계나 현실성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기 마련이다. 숫자에 이미 힘의 논리가 담기는 것이다.
따라서 회사에서 언급되는 숫자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과거와 실적에 근거하여 땅에서 올라온다면,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같은 아라비아 숫자이지만 이 둘은 같지 않다.
미래에 대한 추정과 끼워 맞추기의 사이
회계가 추정에 넌더리를 내는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말한 의지의 숫자 때문이다. '의지치'라고도 불리는 이 숫자들은 이미 목표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회계팀은 목표금액을 정해두고 일을 하는 부서가 아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회계팀의 일이다.
의지치는 결론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논리와 자료가 보강되어야 하지만 회계는 개별적인 원인에서 시작해 귀납적으로 결론을 내놓는다. 업무의 시작점이 서로 정반대에 놓여 있다. 동일한 장소와 대상을 보더라도 서 있는 위치와 바라보는 관점이 정 반대에 있으면 견해가 갈리기 마련이다. 업무의 관점과 행동을 정반대로 수행하라고 하면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몇몇 '애로사항'이 더해지면 추정은 회계와 상극이 될 수밖에 없다.
① 미움받을 용기가 없다.
회계는 근거가 있는 실적을 바탕으로 숫자로 대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추정 업무는 이미 어느 정도 경영진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의도의 다른 말은 눈치인데 회계팀은 좋든 싫든 눈치 없는 짓을 해야 하는 부서다. 경영진이 기업실적의 개선을 원한다고 해서 없는 매출액을 더 잡거나, 비용이나 원가를 줄일 수 없다. 남들이 장밋빛을 얘기할 때 그건 장밋빛이 아니라고 얘기해야 한다.
회계는 극단적인 T성향과도 같다.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 현재의 사실관계가 이렇다고 얘기하는 것이 회계의 본질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듯 사실이란 때론 누군가의 감정을 건드리고 불쾌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회계의 시선에서 바라본 추정 재무제표를 어떻게든 만들어 가져가면 흔히 말하는 '빠꾸'를 당한다. 의지보다는 사실을 더 많이 담아낸 숫자이다 보니 그분들의 욕망과 목표에 성이 차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몇 번 더 반복하다 보면 아무리 용기를 품은 야망 있는 재무통 임원도 고개를 꺾을 수밖에 없다. 소신을 지키며 살기에는 만들어야 할 적이 너무 많고 두렵다.
② 의지+의지+의지 = 산으로 가는 숫자
이쯤 되면 회계도 결국 머리를 숙여 똑같이 의지가 담긴 숫자에 맞춰 움직이게 된다. 추정 재무제표를 만들려면 예상 매출액, 내년도의 설비투자계획, 연구 프로젝트, 인력 운용방안, 생산계획 등 각종 계획 자료들을 타 부서들로부터 취합받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숫자들은 사실과 의지가 혼재되어 있다. 의지를 담은 숫자들이 하나씩 더해질수록 매 순간 땅에서 조금씩 멀어져 하늘로 올라간다.
영업, 구매, 연구개발, 인사, 생산 부서마다 각자의 이해관계와 소망이 담긴 숫자들은 최대한 낙관적인 숫자들이다. 깊이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프니 뇌를 비우고 숫자를 더해놓고 보면 회사의 평소 재무제표와 뜬금없는 숫자가 튀어나온다. 의지들이 더해져 대기권을 뚫고 올라갔으니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선택지는 둘 중 하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고 설명할 수 없는 숫자를 들고 가 보고를 올려서 욕을 먹거나, 다시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현실성'을 맞추기 위해 숫자를 깎아가며 다시 내려가야 한다. 이 수준까지 오면 이제 추정 재무제표의 숫자는 실적도 의지도 아닌 어딘가의 어중간한, 이도저도 아닌 난수일 뿐이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숫자는 계속 바뀌고, 그러다 보면 파일 버전이 v1, v2, v3, 최종, 진짜최종으로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난다. 이제 숫자는 통제할 수 없고 여기저기 마구 날뛴다.
③ 왜 실적이랑 안 맞아?
어찌어찌 손을 본 숫자로 보고를 넘기더라도 관문은 남아 있다. 추정 업무는 실적과 계획을 비교하여 차이가 발생하는 사유를 분석해야 한다. 월 단위 또는 분기 단위로 회계마감이 된 실적 재무제표가 완성되면 추정 재무제표의 적정성이 시험대에 오른다. 그리고 당연히 이 둘은 일치는커녕 근사하지도 않을 때가 많다.
회사는 과거부터 자신의 업무수행 방식과 내부관행, 기업문화와 의사결정 구조에 따라 관성적으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재무제표의 변동이 있더라도 그 변동의 사유를 추적할 수 있다. 생산 증대를 위해 특근이 증가하면 노무비가 오를 수밖에 없고, 신제품의 공급을 확대하려면 판매촉진비와 광고선전비가 증가한다. 과거의 원인이 발생하여 현재의 결과가 도출되므로 모든 실적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위에서는 실적을 계획과 비교하여 왜 맞지 않냐고 물어보기 시작한다. 회계팀도 시원하게 답해줄 수 없다. 비교라는 건 있는 것(有)끼리의 저울질인데 근거가 없는 것(無)과 있는 것(有)을 비교하려 드니 성립이 안 된다. '원하는 결과에 끼워 맞추라고 하니까 그렇지'라는 생각이 몇 번이고 떠오르지만 속으로 삼킨다.
미래를 예측함으로써 의사결정을 지원하겠다는 포부에서 시작된 추정 업무는 그렇게 점차 본질에서 멀어진다. 어떻게 하면 미래를 준비할까라는 물음이 어떻게 하면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을까로 바뀐다.
도망쳐도 성적표는 날아온다.
회사가 경영실적이 좋고 순항할 때는 추정 재무제표에 대한 압박이 없다. 모든 것이 순탄하니 앞으로도 걸림돌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회사 전반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현재가 만족스러운데 미래를 구태여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추정 업무는 회사가 어려워질 때 고개를 들고 기승을 부린다. 현금성자산 보유량과 유동성이 줄어들수록, 채권 회전일이 늘어날수록,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이 반복될수록 불안감이 커진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고 불안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눈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어진다. 자연스레 미래로 고개가 향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곧 현재에 대한 불만이다.
누구나 면접 때 한 번 이상은 어려운 순간과 경험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질문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문제해결능력,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의 평정심을 평가하기 위한 항목이다. 마찬가지로 경영진의 자질과 능력도 회사의 재무상태가 어려울 때 드러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숫자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좀 더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내가 회계는 잘 모르지만 그건 잘못된 거 아냐?'라고 역으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가장 우려스러운 유형은 자신이 원하는 그림에 맞춰 숫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하는 이들이다. 조직원들에게는 문제해결 능력을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문제를 마주하기보다는 문제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정의하려고 한다.
가능하지도 않은 꼼수와 눈속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온갖 임시대책들을 가져오지만 어차피 문제를 관통하지 않으므로 변두리를 계속 맴돌기만 할 뿐이다. 목적지로 향하지 않고 아무리 다른 길로 돌아서 가봐야 시간만 더 오래 걸리고 힘만 든다. 실무적으로 더 복잡한 절차, 관리하고 신경 써야 할 요소의 증가, 자원과 공수의 추가투입은 휘하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미래를 준비하고 싶다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 된다. 지금의 현재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미래였다. 조직과 개인의 문제들은 보통 어느 한순간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문제의 근원은 과거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위기가 찾아오지 않아서 주목받지 않거나 무시할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지금 현재가 개선되지 않으면 문제는 미래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지금 '이 순간'을 해결하지 않으면 과거와 현재, 미래는 아무런 변화도 차이도 없이 동일한 시간이 될 뿐이다. 지금의 문제들에 집중하고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점점 변해가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변화는 점진적이라서 한 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변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지점까지 관성이 붙어야 하고 그 관성은 자신감을 연료로 한다. 어제보다 무엇 하나라도 바뀌고 변하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감이 붙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자기 신뢰의 부족이다. 자신을 신뢰하는 좋은 방법은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확실한 가치들을 하나씩 나의 영역 안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확실은 확신으로 변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