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독서기록을 돌아보며
2025년도 어느덧 마무리되었다. 작년 5월부터 독서를 시작한 이후로 꾸준히 책을 집어 들었다. 작년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견뎌내기 위한 회복의 독서였다면, 올해는 구체적으로 읽고 싶은 책을 찾아가고 독서의 방향성을 정하는 시기였다. 독서모임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고, 뜻하지 않게 브런치도 시작하게 되었으니 독서가 개인의 인생을 바꾼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된다. 올해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발자취에는 책이 함께했다.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돌아보는 정산의 글을 적어본다.
01. 기계의 반칙, 넬로 크리스티아니니
대규모 데이터와 세계에 대한 비이론적 모델은 유용한 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델은 실제로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피조물인 기계의 결정을 해석할 방법이 없을 수도 있는데, 만약 있었다면 기계가 길을 잃지는 않았는지 확인할 때 편리했을 것이다.
p.85
- 인공지능의 '지능'이 인간의 감각/인식체계와 어떤 면에서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쉽게 풀어썼다.
- 인공지능의 개념과 기술적 설명, 현재의 한계점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 AI에 대한 긍정론/부정론의 방향성이나, 정보의 나열에 불과한 트렌드/미래예측/실전사용 외의 객관적인 책을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 평점 : 4/5
02. 핸드오버, 데이비드 런시먼
인간과 기계의 특징을 모두 가진 인공적인 형태의 우리 자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인공 인격들은 바로 시민과 소비자로서, 이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통제하게 되었다.
p.148
- '인공의' 지능이라는 개념에 있어 국가와 기업이라는 인공집단이 먼저 존재했음을 설명하는 책.
- AI에 인격을 부여하는 데 논쟁이 있지만 이미 기업은 '법인격'을 부여받고 있으며, 언론과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우리는 '기업은, 국가는' 같은 주체로서의 표현을 사용한다.
- 법과 자본이라는 무형의 수단으로 국가와 기업이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AI가 추가된다면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역할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를 다루고 있다.
- AI의 기술적 관점에서의 변화보다는 정치사회학적 관점의 변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한다.
- 내용이 다소 딱딱하고 책의 상당 부분이 국가와 기업에 대한 설명 위주인 점은 조금 아쉽다.
- 평점 : 3.5/5
03. 민들레 와인, 레이 브래드버리
꽃들이 압착기 속으로 들어가는 지금 떠오르는 그 단어를, 온 세상이 하얀 겨울이 되어도 되풀이할 것이다. 입속에서 그 단어를 자꾸자꾸 되풀이할 것이다. 미소처럼,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햇빛처럼.
민들레 와인. 민들레 와인. 민들레 와인.
p.37
- 가상의 마을 그린타운에서 여름날 벌어지는 여러 일화들을 엮어 놓은 소설집
- 여름이 아닌 계절에 읽더라도 여름을 느낄 수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같이 읽으면 더 좋다.
-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한 편의 산문집을 읽는 느낌에 더 가깝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문장력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 평점 : 3.5/5
04. 키리냐가, 마이크 레스닉
키리냐가는 완전히 다른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자기 삶에 만족하며 생각할 필요를 못 느끼는 부류와 우리가 힘들여 만든 사회로부터 멀어지기만 하는 생각을 해내는 부류로. 상상력이 없는 쪽은 결코 우화를 만들 수가 없었으며, 상상력이 있는 쪽은 키리냐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채 외래의 생각을 수용하는 자신들만의 우화를 만들었다.
p.355
- 케냐의 키쿠유 족이 나날이 개발로 인해 황폐해지는 지구를 떠나 우주 거주지역으로 이주하는 아프리카 SF
- 전통과 발전이라는 대립 속에서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비인간적 사회를 지적하고 있다.
- 전통의 보존이란 무엇인지, 과연 온전하게 전통을 지킨다는 게 가능한지 고민하게 한다.
- 평점 : 4/5
05. 신의 망치, 아서 C. 클라크
딸이 사는 행성은 딸아이가 태어난 뒤로 태양을 다섯 바퀴밖에 돌지 않았지만, 딸의 나이는 공식적으로 여섯 살이었다. 어떤 아이도 생일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687일이나 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구의 달력은 여전히 쓰이고 있는 유물이었다. 그게 마침내 폐기된다면 화성과 모행성의 접점이 하나 더 끊어지게 될 것이다.
p.158
- 영화 <딥 임팩트>의 원작소설로 지구로 날아오는 거대 소행성을 막기 위한 지구의 분투를 담고 있다.
- 과거의 작은 변화로 인해 촉발된 사건이 미래에 반드시 일어난다는 운명론을 말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사소한 시도와 노력들 하나하나가 모여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담담하게 말한다.
- 아서 클라크라는 작가의 이름만 믿고 기대하며 읽으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 평점 : 3/5
06. 증언들, 마거릿 애트우드
나는 자질에 소명을 맞춰 주려 애쓴다. 그러는 편이 낫고, 나는 차선을 굳게 신봉하는 사람이다. 최선이 부재할 때는. 그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다.
p.312
- <시녀 이야기>의 결말 이후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작가가 준비한 후속 편
- 전작이 제정일치 디스토피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나약함을 일기의 형식으로 가슴 아리게 써 내려간데 비해 <증언들>은 사실상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의 성격에 가깝다.
- 결말을 꼭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을만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시녀 이야기>에서 끝내도 무방할 듯하다.
- 평점 : 3/5
07.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케이트 윌헬름
그들은 미래를 내다볼 상상력이 없었기 때문에 행복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회의 적이었다.
p.337
- 문명이 붕괴하는 대재앙 이후 클론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명맥을 유지하는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 생명의 인위적인 창조는 반드시 대량생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가,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개체의 가치는 희석되고 줄어들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 자본과 과학기술이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가 된 현대에 왜 개인이 고립감과 무력함을 느끼는지를 차분하고 아름답게 전달한다.
- 조용하고 아무런 소음이 없는 주말 오전 또는 늦은 밤에 읽는 것을 추천
- 평점 : 4.5/5
08. 노예선: 인간의 역사, 마커스 레디커
죽어서 바다에 던져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는 "종종 심해로 빨려 들어가는 그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느끼는 자유가 부러웠으며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p.145
- 아프리카 문화와 노예제도에 대한 관심으로 읽기 시작한 책
- 대서양 노예무역 그리고 운송수단인 노예선의 역사적 의미, 배 안에서 벌어지는 선장-선원-노예의 계급갈등, 노예와 선원들의 일상과 만연한 억압과 폭력 등 다양한 주제를 오간다.
- 수치나 그래프, 도표로서가 아닌 고문받고 죽어가야 했던 개개인들의 슬픔을 모아 귀납적으로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거슬러 올라간다.
- 평점 : 4/5
09.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완벽한 친구란 있을 수 없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단점들을 이유로 사람들을 내친다면 그들이 가져다줄 기쁨과 행복 역시 누릴 수 없게 된다.
p.117
- 극한환경에서 자신의 육체를 소모품으로 제공해야 하는 클론 노동자 미키에 대한 이야기
- 소재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작품의 내용이나 몰입도도 딱 소모성으로 읽고 넘길 정도로는 적당하다.
- 영화화되었다는 시사성이 작품성보다 더 주목받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 평점 : 2.5/5
1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p.204
- 공산주의와 소련의 침략지배라는 '무거움' 속에서 희로애락을 반복하는 두 남녀의 '가벼움'을 통해 인생을 둘러싼 거시적인 환경과 미시적인 감정의 얽힘이 인상 깊다.
- 가벼움이 없으면 무거움이 존재할 수 없듯, 삶에는 고통/의무/책임감이라는 무거움이 있기에 그것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도 존재할 수 있다.
- 삶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든 것들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책
- 평점 : 3.5/5
11. 생명창조자의 율법, 제임스 P. 호건
"세상의 모든 문제는, 타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고귀하고 올바른 사상 때문에 생겨난 거라고. 나는 내 이득을 챙기면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놔둘 뿐이야."
p.219
- 기계가 생명처럼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면 어떤 문명을 이룰 수 있을까를 상상한 과학소설
- 그럴싸한 미디어와 권위에 기대는 지배자들의 '상식/사회적 가치/사회통념'이 정말로 우리에게도 유익하고 필요한 가치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 주제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극적인 전개, 다양하면서도 겹치지 않는 캐릭터성을 가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느낌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 평점 : 3/5
12. 코스모스, 칼 세이건
거룩한 분의 섭리로 우리는 튀코 브라헤라는 성실한 관측자를 가질 수 있었다. 그의 관측 결과는 …… 이 계산의 오차가 8분이라고 판단해 줬다. 하늘이 주시는 선물은 감사히 받아들여야 마땅하거늘. …… 내가 8분의 오차를 모른 체할 수 있었다면 나는 내 가설을 땜질하는 식으로 적당히 고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시될 수 없는 성질의 오차였다. 바로 이 8분이 천문학의 완전 개혁으로 이르는 새로운 길을 내게 가르쳐 줬던 것이다. ― 요하네스 케플러, p.138
- 천문학자들의 삶, 생명의 발달, 유전자, 원자와 분자, 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미시적 세계에서 천체에 이르는 광범위한 '우주'를 넘나 든다.
- 왜 유니버스나 스페이스라는 말 대신 '코스모스'라는 말을 썼는지 읽고 나면 이해된다. 그래서 오직 우주나 별에 대한 얘기만을 기대하고 펼친다면 다소 2% 부족하게 느낄 수도 있다.
- 우주에 대한 설명보다도 과거 천문학자들을 통한 우주관의 발전史가 더 흥미로웠다.
- 평점 : 3.5/5
13.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는 그곳에 모인 신사들의 동료로서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가 병석에 누운 지는 벌써 몇 주일째였고 불치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자리는 아직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만약 사망할 경우 그 자리에는 알렉세예프가 임명될 것이고, 그러면 알렉세예프의 자리엔 빈니코프나 시타벨이 임명될 수 있다고들 생각했다. 그래서 집무실에 모인 이 신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판사들 당사자나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였다. p.8
- 명망 있는 지위와 품위가 뜻하지 않은 죽음 앞에서는 어디까지 왜소해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책
- 2020년대에 맞이하는 죽음이나, 톨스토이 시대의 죽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 죽음의 다양한 인간의 얼굴(치졸함, 집념, 육신의 고통, 정서적 사망)을 알고 싶다면 읽는 것을 추천한다.
- 평점 : 4.5/5
14. 당신은 화성으로 떠날 수 없다, 아메데오 발비
지구를 떠나 이주하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진보된 기술력을 요구하며,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먼저 파멸과 멸종의 위협을 극복해야 한다. 결국, 우주 식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리적 순서를 뒤집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인류가 생존하려면 다행성 종이 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행성 종이 되길 원한다면 먼저 생존해야 한다.
p.172~173
- 각종 매체와 우주사업체들이 내세우는 우주개척 사업의 포부와 현실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를 알려준다.
- 화성으로 가서 정착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력과 자원이라면 그걸 지구에 투자하고 우리를 돌보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냐는 작가의 말이 공감된다.
- 글로벌 사업가들의 우주사업은 '실현가능성'보다는 '쇼맨십'에 더 치중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평점 : 3.5/5
15. 어둠의 심장, 조지프 콘래드
"우리를 그런 흉함에서 구해주는 것은 이념뿐일세. 그 배후에 자리한 이념, 감상적인 구실이 아닌 이념, 그리고 그 이념에 대한 헌신적인 믿음, 모셔놓고 앞에서 절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무엇……." p.16
- '현대인' 또는 '문명인'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어놓은 허상에 불과하며, 문명을 벗어난 자연에 놓이는 순간 야만과 문명의 구분선은 어디에도 없음을 지적한다.
- 숲의 가장 깊고 빽빽한 밀림은 햇빛조차 들어올 수 없는 어둠이 가득하듯, '나'를 둘러싼 지위와 직업과 사회적 위치의 내면에는 똑같이 폭력적인 존재들이 들어차있다.
- 읽다 보면 작가의 현란한 문체에 머리가 어지러워지지만 그 또한 정글을 따라 탐험하는 등장인물의 시선과 겹쳐 밀림에 갇힌 분위기를 더해준다.
- 평점 : 4/5
16. 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이제 나는 사람들이 "찰리 고든 짓을 했다"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안다.
나는 부끄럽다.
p.71
-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과 사고를 가진 성인남성이 수술을 받아 천재가 될수록 세상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룬 책
- 자신에게는 결함이 없기를 원하면서도 타인은 나보다 못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이중성을 꿰뚫어 본다.
- 책이 진행될수록 주인공 '찰리'가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방식의 변화를 지켜보는 점이 감상포인트다.
- 평점 : 4.5/5
17. 절반 세대가 온다, 한국일보 창간기획팀
그렇다면 육아하는 직원이 '불이익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휴직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뭘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이가 없는 사람도 눈치 보지 않고 휴직하는 것"이다.
p.171
- 인구 감소 시대에 대한 '대책'을 쏟아내는 언론이나 정부정책 대신 다가올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를 꾸밈없이 객관적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
- IMF, 남아선호사상 같은 과거 시대의 파동이 수십 년이 지나 해일과 같은 파도가 되어 돌아왔음을 알려준다.
- 인구가 줄어드는 세상에서 개인의 가치가 늘어날수록, 어린아이만이 아닌 노인, 1인가정, 동거관계 등 다양한 경제적-사회적 형태의 주체들도 함께 지원하고 모두를 포용해야 한다는 수용성의 지적이 공감된다.
- 평점 : 3/5
18. 화성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못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지구인은 크고 아름다운 것들을 망치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 한복판에 핫도그 가판대를 세우지 않은 이유는, 그저 너무 외딴 곳이라 대규모 상업단지 조성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지구에서도 작은 지역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이 행성은 모든 곳이 오래되었고 색다릅니다. 당연히도 이곳 어딘가에 정착해서 오염시키는 작업을 시작해야겠지요. 우리는 저 운하를 록펠러 운하라고 부르고, 저 산을 킹 조지산이라 부르고, 저 바다를 듀폰해라 부를 겁니다. 그리고 루스벨트와 링컨과 쿨리지시티가 탄생하고 올바른 이름으로는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제각기 적절한 이름이 있는 곳인데 말입니다." p.123
- 친절하지 않은 주민이 사는 행성에 친절하지 않은 지구 이웃들이 무단으로 밀고 들어와 살아가는 이야기
- 지구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인간의 진출이 누군가에게는 침략이라는, 외계인 침공이나 우주전쟁을 뒤집은 서사를 통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지고 잊히는 것들을 조명한다.
- 연대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인물과 지명이 나오지만 그중 주인공이라 할 인물은 딱히 없다. 레이 브래드버리 특유의 문체가 더해져 마치 고대나 중세의 구전 설화를 듣는 기분이다.
- 평점 : 3.5/5
19. 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세라 자페
아주 오래전 노동은 너무 고되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랑 결혼할지 머무적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설 속 인물들이 대체 어떻게 먹고 사는지 의문이 듦과 동시에 깨달음도 얻는다. 부자들에게 일이란 누군가 대신해주는 것이었다.
p.8
- 직무와 산업을 불문하고 일이 왜 재미없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지를 역사, 경제, 예술, 사회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 자신이 일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일에 열정을 쏟지 못하는 부족한 인간은 아닌지 고민되는 사람들을 위한 책
- 혹여나 가슴을 다독여주는 따듯한 힐링과 위로의 문장을 기대한다면 다른 책을 고르는 것이 좋다.
- 평점 : 5/5
20. 니그로: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 W.E.B. 듀보이스
오늘날 미국의 학생들은 과거 남부 노예제도가 안고 있던 명백한 모순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안정되어 있고 관대한 가부장제에 관해 듣는다. 다른 한편으로, 야만스러운 잔혹함과 무한한 권한과 널리 행해지는 인간 억압에 대해서도 듣는다. 어느 쪽이 진정한 모습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둘 다 사실이다. 두 가지는 한 방패의 양면이며, 서로 다른 방패이다. 한편으로는 멋진 시골과 타운의 저택 모습이고 또 한편으로는 연초, 쌀, 목화를 기르는 벌판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p.189
-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시대를 살아간 경험자가 직접 알려주는 흑인 문화와 역사 그리고 아메리카의 흑인사회를 짚는 개론서
- 노예제라는 제도에 의한 차별은 사라졌어도, 인종차별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차별이 역사에서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가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 두껍고 방대한 아프리카에 대한 교양서들보다는 이 한 권에 담긴 역사와 의식의 흐름이 더 와닿는다.
- 평점 : 4/5
21. 원더풀 랜드, 더글라스 케네디
인간은 모두 수정란에서 시작되듯 분열은 인간의 천성이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인간의 역사는 분열과 파열의 긴 대하소설이다. 모두들 커플로 분열되고, 가족으로 분열된다. 국가로 분열된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탓한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나 멀리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고 함께할 수 없다며 문을 닫아 잠그는 건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인간의 조건이다.
살아가는 건 나뉘는 것이다. p.510
- 극한의 이념과 정치대립으로 인해 또 한 번의 내전을 겪고 갈라진 미국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두 분열국가의 정치암살극이 배경이다.
-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갈림길에 사람을 몰아넣는 것이 과연 진정한 선택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 소설 자체보다는 이런 소설이 나올 만큼 미국인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현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읽고 나면 우울감이 밀려온다.
- 3.5/5
22. 핸드 투 마우스, 린다 티라도
내 인생에서 그저 최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자동차 없이 일자리를 두 탕 뛰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한 일터에서는 3킬로미터 정도, 다른 일터에서는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소화할 수 없는 거리는 아니다. 재미로 그 거리를 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 뛴 다음엔 집에 가서 쉰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전 다섯 시쯤 일터로 걸어가 여섯 시부터 정오까지 식당 종업원 일을 했다. 한 시쯤이면 집에 도착했고, 처리해야 할 잡일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뻗었다. 그리고는 오후 여섯 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바에서 일하기 위해 머리를 다듬고 5킬로미터를 걸어가 새벽 한두 시까지 바텐더로 일한 후, 동료에게 구걸하여 차를 얻어 타고 오거나 집으로 걸어왔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 두세 시. 나는 잠시 쉬고, 쪽잠을 자고, 다시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p.95
- 워킹푸어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본 미국인 '린다 티라도'가 가난에 대한 체험과 생각을 써낸 에세이
- 현대사회가 가난을 얼마나 숨기고 싶어 하고, 또 얼마나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지를 알려면 토론회나 기사 하나를 읽는 것보다 이 책을 읽는 걸 추천한다.
- 가난한 사람들은 왜 계속 가난의 상태가 유지되는가를 복잡한 모델이나 이론 없이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감 없이 속살을 다 보여준다.
- 일부러 정제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와 주제를 담고 있어 다소 노골적인 면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
- 평점 : 4.5/5
23.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 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그리고 누군가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p.373
- 처음에는 나이 든 집사의 여행기이자 푸념으로 읽히지만,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책의 이야기가 새로워진다. 마치 점점 진하게 우러나오는 찻잎처럼.
- 갈수록 잘게 쪼개지고 전문화되는 현대사회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말한다.
- 직업에 지치거나, 삶의 의미를 모르겠거나, 노력한 일이 뜻대로 안 풀려 괴롭거나,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고 꿈꿨지만 평범한 자신의 현실이 힘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 평점 : 5/5
24. 아이티 혁명사: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 로런트 듀보이스
수세기 동안 억압과 착취에 시달렸던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자연법 이론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밀고 감으로써, 즉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고 누구나 시민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1789년에 채택된 프랑스의〈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선포된 권리들이 실로 보편적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p.474
- 아이티 하면 대지진 밖에 안 떠오르지만 아이티 섬은 미국과 프랑스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대혁명이 일어난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국가임을 알게 된다.
- 혁명의 가치가 다른 인종과 계급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오지 못하며, 혁명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압제이자 폭력이라는 점을 조명함으로써 혁명의 여러 얼굴을 생각해보게 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라는 개인을 넘어 아이티 혁명 전체의 흐름을 알고 싶다면 꼭 읽어봐야 할 책
- 평점 : 4/5
25. 사랑과 결함, 예소연
- 사랑이 얼마나 때 묻고 구질구질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집
- 더럽다기에는 너무 깨끗하고,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해지고 금이 간 연인/친구/가족의 사랑을 담고 있다.
- 다만 결함에 너무 초점을 맞춘 듯해 죽음에 대한 언급이 잦아 '죽음과 결함'이 더 맞는 제목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칙칙한 기분이 든다.
-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봐서 알 법 하지만, 그래서 또 굳이 책으로 접하고 싶지는 않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 평점 : 2.5/5
26.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윌리엄 해즐릿
혐오만이 죽지 않는다. 어디를 가나 이 원칙이 작용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짐승들은 무자비하게 서로를 물어 뜯는다. 어린아이들은 재미로 파리를 죽인다. 모든 사람들이 사고와 범죄에 관한 신문 기사를 최고의 잡담거리로 삼는다. 불이 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 구경한다. 그들은 화재가 진압되어도 결코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불을 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불이 꺼지면 재미가 식는 것이다.
p.39
- 부정적인 감정과 사고를 터부시 하는 현대의 긍정강요 사회에서 혐오가 어떤 순기능이 있는지를 조명한다.
- 다만 작가도 개인적 차원의 혐오는 감정적인 배출구로서 작용하지만 거기에 무비판적인 집단혐오 또는 권력의 논리가 개입되는 순간 위험함을 지적한다.
- 다들 쉬쉬하면서도 은근히 묵인하고 넘어가는 무언가를 누군가 대신 당당히 말하는 데서 대리만족감을 느낀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 평점 : 3.5/5
27. 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솔라리스의 바다와 소통할 수 있겠어?"
p.52
- 외계행성 솔라리스에서 인간의 기존 관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고,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겪는 '인식'과 '의미'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다룬다.
- 외형만 인간과 다를 뿐 여전히 인간과 소통이 가능하고, 인간처럼 평화/자유/사랑/희망 같은 인간적 가치를 공유하는 '인간적 외계관'이 적용되지 않는 작품을 읽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 읽다 보면 과학소설이라기보다는 인식론/의미론에 대한 철학을 사유하는 쪽에 가깝다.
- 평점 : 5/5
28.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마크 그레이엄/제임스 멀둔/캘럼 캔트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마크 저커버그 같은 이들이 휘두르는 무제한적인 권력의 위험성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들은 세상을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다양한 사회 집단이 대립하는 복잡한 정치적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은 해결 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과 같은 똑똑한 사람들이 적절한 자금과 자원을 제공받기만 하면 그런 문제들은 하나하나 풀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낙관적 세계관 속에서, 그들은 세상이 점점 더 나아지고 있으며 자신들이 그 진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p.250
- AI의 사용법, 트렌드, 기술적 분석, 국제정치 같은 겉으로 드러난 실용성보다는 AI와 빅테크 기업들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책
- 생성형 인공지능이 편리함과 그럴싸한 기업가 인터뷰 뒤로 환경, 자본, 감정, 권력 같은 인간의 자원을 얼마나 마구잡이로 흡입하는지 실태를 알 수 있다.
- 우리가 쓰고 있는 SNS나 AI의 답변은 지금도 제3세계의 누군가가 박봉을 받으며 가혹한 공장형 환경에서 감정과 건강을 희생하고 있는 결과물이다.
- 평점 : 5/5
29.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루시우 데 소우사/오카 미호코
본서에서 그려낸 바다를 건넌 노예들의 생애는 다미안과 같이 복 받은 경우는 드물고, 전란 중에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악한 생활 환경에 있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사는' 것을 선택했다.
p.239
- 흑인, 아프리카, 미국 등 노예무역과 노예제는 대서양 노예무역과 서구사회의 극히 일부 시대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노예제의 다양한 성격을 알고자 집어든 책이다.
- 16세기부터 이미 생각 이상으로 동아시아, 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는 국제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 스페인 해외원서 중 일반 독자를 위해 일부 내용을 일본에서 발췌하고 편집한 책이다 보니 더 깊게 파고들지 않는 점에서 조금 아쉽긴 하다.
- 평점 : 3/5
올해의 베스트 3
세 책은 제각기 내용도 장르도 제각각이지만 의외로 공통점이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바로 드러나지 않는 가치와 의미, 실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직업과 사회가 개인의 가치를 어떻게 '직업인'으로 국한시키는지를, <솔라리스>는 존재의 실존과 존재의 의미는 서로 구별되며 의미는 존재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찾아가고 발견하는 것임을 전달한다.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는 언론과 인플루언서, 기업인들이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 AI산업 이면에서 희생된 것들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갈수록 파편화되고, 불확실성이 커져만 가는 시대다. 국제정세는 혼돈의 도가니고 국내는 분열된 정치와 의견의 대립이 계속된다. 어디에서도 절대적 가치가 보이지 않는 듯하고 불안감이 커진다. 불안감이 커지니 당장의 실용적인 접근법이나 속성으로 정보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눈이 돌아간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들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가치는 불확실성에 대해 손익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얻을 수 없다. 가치는 우리가 찾아가지 않는 한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득이나 결과보다는 '신뢰'를 품고 헤쳐 나가야만 점진적으로 쌓인다.
현상을 넘어 그것에 담긴 더 큰 의미를 생각해 보라는 가르침을 준 세 책을 베스트로 꼽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