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순양함 무적호> 스타니스와프 렘
"그곳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혼자 들어갔다가…… 돌아 나올 수 있네. 헬멧, 차량, 무기도 없이 말이야……."
p.272
이런 분들에게 이 책을
- 우주를 탐험의 대상이 아닌, 인류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묘사한 작품을 읽고 싶은 분
- 상식을 부정하는 환경과 현상 속에서 인간성과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싶은 분
- 고민과 고난 속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서사를 읽고 싶은 분
책을 만나기까지
인터넷 독서 클럽에서 작년부터 고전 과학소설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고전의 기준은 사람마다 그 범위와 정의가 다르겠지만 주로 2000년 이전에 쓰인 작품들을 골라 읽는 중이다. 다양한 국적과 시대의 작품을 읽는 목표로 최대한 이 작가, 저 작가를 오가며 선정하고 보니 서구권이 주를 이루었다. 동구권의 소설도 읽고자 일부러 스타니스와프 렘 작가의 대표작들을 선택했고 <솔라리스>에 이어 <우주 순양함 무적호> 차례가 되었다.
이름만 보면 마치 70~80년대에 있었을 법한 옛날 만화나 만화책 같은 제목이다. 도리어 그 직관적인 제목이 너무나 강렬해 시선을 돌리려다가도 눈이 고정된다. 원색적인 노란 책표지와 색의 대비를 이루는 검은 제목. 그만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솔직함.
<솔라리스>가 외계의 미지를 담고 안갯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면,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굵고 거친 손길로 쇠와 기름, 플라스틱 냄새가 나는 강철 함선으로 파견을 보낸다.
우주는 자신을 설명할 의무가 없다
위력 2급의 순양함 '무적호'는 레기스-3 행성에 도착한 뒤 연락이 두절된 동급의 함선 '콘도르호'의 행방을 확인하고자 파견된다. 조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행성은 오히려 더 많은 의문과 수수께끼를 남긴다. 바다가 있고, 연안지대와 깊은 물속에 각종 어패류와 해조류가 확인되지만 지상에는 어떤 동식물이나 곤충도 보이지 않는다. 채집한 어류들은 지구의 물고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기장 감지기관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생태계, 충분히 발달한 해양생물들을 품은 바다와는 별개로 육지는 생명을 거부하듯 척박하기만 하다.
"사실상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라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마치 육지로 생물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무엇인가가 막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듯이요……."
p.69
얼마 지나지 않아 함선의 조사단은 인공위성을 통해 지표면에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도시와 같은 구조물들을 발견한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생명이 거주할만한 내부공간이나 출입구가 없는 기형의 거석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다. 쇠기둥과도 같은 중심축을 기반으로 돌기와 기둥이 뻗어나가는 모양새는 마치 솔 같기도 하고, 빽빽하게 가지가 뻗어 나온 나무 같기도 하다. 어느 것은 멀리서 보면 원형이고, 어떤 것은 직사각형이며, 또 어떤 기둥은 직각이지만 어느 것은 곡선을 그리며 아치의 형태다.
기능도, 구조도, 기원도 알 수 없는 무정물 속에서 탐사대는 할 말을 잃는다.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기하학과 수학적 의도가 모든 모서리와 골목길마다 지적생명체의 개입을 암시한다. 하지만 대체 어떤 생명체가 들어가 살 공간도 없는 기지나 도시를 메마른 광야 한복판에 짓는단 말인가? 어디에도 그 의도와 기능성을 추측하거나 유추할만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가장 정밀하며 최고의 기술을 담은 인간의 조사도구와 연구장비는 미지의 앞에서 장난감보다 나을 것이 없다.
도시, 폐허 또는 그 어느 것도 아닌 공간을 조사하던 중 무적호는 콘도르호의 잔해를 사막에서 찾아낸다. 거대한 탑과도 같은 콘도르호는 바람에 스러진 나뭇가지인 양 사막에 선체가 처박혀 있고, 그 주위로는 온갖 화물들이 나뒹군다. 함내로 진입한 대원들은 이상한 점들을 하나 둘 발견한다.
사고현장과 콘도르호 안에서 발견된 일부 승무원들의 시신에서는 외상이나 물리적 충격의 징후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들은 굶주림과 탈수로 죽어갔다. 전함 안의 보급품 창고와 식당 냉동고에는 식재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전염병이나 외부 오염원으로 인한 감염의 흔적도 없다. 어떠한 외부의 위협도 없이 그들은 서서히 말라죽은 것이다. 그나마 확인 가능한 항해일지와 무전 기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파리 떼"
바다를 제외한 어디에서도 생명이 확인되지 않는 행성에서 파리라니. 그리고 겨우 파리 떼한테 수백 명의 승무원과 함선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무너지다니. 무적호의 승무원들이 사건을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콘도르호와 레기스 행성은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콘도르호 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하나 말이 되지 않는 인과 관계의 연속이다. 독자는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작품의 진행상황을 내려다 봄에도 등장인물들에 비해 딱히 더 알고 있는 바가 없다. 작가는 어디에도 수수께끼를 유추할 단서를 남겨놓지 않는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독자는 점점 하늘 위의 전지적 시점에서 내려와 무력하며 두려움에 빠진 또 다른 승무원 A가 될 뿐이다. 기존의 논리와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과 미지의 사고 속에 내동댕이쳐진 독자는 불친절하지만, 그래서 더욱 기이하고 이질적인 공간에 몰입하게 된다.
무적호는 강과 바다를 끓어오르게 할 광선무기를 탑재하고 있고, 어떤 충격도 막아낼 수 있는 보호막을 가지고 있으며, 죽은 사람의 사망 직전 기억을 영상화할 수 있는 의료기기도 가지고 있지만 이 도구들 중 어느 것도 레기스에서 일어난 일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무적호의 기술과 능력은 오직 인간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만들어졌을 뿐이다. 무적호의 자부심은 레기스의 바위 하나조차 어찌하지 못한다.
레기스는 무적호와 독자를 의식조차 하기 귀찮다는 듯 태연하게 희망과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계속 해오던 대로 자신의 존재를 이어간다. 어디 원인과 결과를, 이유를 찾아볼 수 있으면 찾아보라는 듯 자신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승무원과 독자는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 구석구석 파헤치지만 모든 시도와 실험이 무위로 돌아갈 때마다 깨닫게 된다. '우주의 모든 곳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냉혹한 진실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유리 가가린을 필두로 유인 우주비행과 우주진출의 기대가 열병처럼 부풀어 오르던 시대의 꿈을 과감히 깨부순다. 희망만으로는 소련과 미국의 패권경쟁이라는 냉전마저 가릴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미디어와 프로파간다를 통해 쌓아 올린 바람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장난임을 일깨운다. 외계의 행성이 무적호와 콘도르호의 사명에 무감각했듯, 우주는 인류를 희망하지 않는다. 레기스는, 우주는 인류에게 자신을 설명할 이유가 없다.
약함을 이기지 못하는 강함
행성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무적호는 조금씩 레기스의 단편을 접하게 된다. 콘도르호의 희생자들이 기록한 '파리 떼'는 행성 지상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 활성화 개체인 '구름'으로, 금속들의 무수한 집합체이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곤충보다 조금 큰 이 알갱이들은 자의식은커녕 생존본능도 없는 무정물이지만 어떤 의도된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들 이외의 존재를 만나면 파괴하는 병기들이다. 하늘을 뒤덮은 메뚜기처럼 또는 철새처럼 자유자재로 형상과 배열을 바꾸며 이동하지만 이것들 어디에도 뇌는 고사하고 신경계나 감각기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무적호의 함장 호르파흐는 '구름'의 존재를 조사하기 위해 탐사대를 여러 차례 보내지만, 매번 승무원과 장비들이 구름에 희생당하는 사고가 반복된다. 사망과 실종을 막기 위해 더 많은 중화기와 전투로봇을 보내도 구름들에게 번번이 무력화된다.
"온통 사막인 이유는 그들이 아무것도 짓지 않고, 아무 문명도 형성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치 있는 것도 만들어 내지 않지요. 따라서 우리는 자연력을 대하듯 그들을 마주해야 합니다. 자연 역시 어떤 판단이다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 형성물들은 존재하기 위해 실존하고, 지속적으로 존재를 이어 가기 위해 작동하는, 그냥 그들 자체인 것입니다……."
p.185~186
함선은 가장 강력한 지구의 기술과 무기를 들고 있다. 2급 함선에 걸맞은 뛰어난 각 분야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자문단으로 함께 탑승하여 그들의 전문지식을 통해 함장을 보좌한다. 하지만 그들이 맞서고 있는 이 벌레 크기의 구름 떼는 무엇 하나 변변이 갖춘 것이 없다. 자신을 보호할 방어막이 없다. 대상을 증발시키는 강력한 레이저도 없다. 그들을 지휘하는 뛰어난 지휘관도 없다. 이것들에게는 공동의 문화와 규범이나 가치체계가 없으며 그로 인해 문명의 기초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지성은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기계더미에 불과하다.
함장과 기술진은 도박수를 띄운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전쟁병기 '사이클론'을 구름 떼에게 보내기로 한다. 사이클론은 핵융합의 힘으로 작동하며, 자율주행과 자기 판단이 가능한 고성능 컴퓨터를 탑재하고, 무엇도 뚫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과 그 아래에는 인류 발명 역사상 가장 단단한 합성금속판을 두른 철제 괴물이다. 그것의 주포가 쏘는 열과 에너지에 피격당하면 태양이 폭발하듯 주변은 녹아내리고 증발한다. 지옥에서 가져온 것 같은 힘으로 인해 그들은 사이클롭스를 꺼내야 할 상황이 되면 '악마에게 일을 맡긴다'라고 돌려 말한다.
사이클롭스의 주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구름 떼를 증발시키고 쇳물처럼 녹여버린다. 구름이 사이클롭스를 벌떼처럼 감싸고 휘감으며 맨몸으로 부딪치느라 불꽃이 튀고 보호막이 붉게 달아오른다. 마찰열과 방사능의 열에 바위와 모래가 녹아 용암천이 들끓고, 하늘은 태양이 솟은 듯 빛이 가득하여 쳐다볼 수조차 없어진다. 신들의 격돌과도 같은 전투가 이어진다. 구름 떼는 매 순간 수만, 수십만의 개체가 녹아 없어짐에도 개의치 않고 더 많은 구름 떼를 사방에서 불러와 사이클롭스를 뒤덮는다.
마침내 그들만이 살아남았다. 엄청나게 거대한 구름의 결정체들한테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승리와 생존을 가능하게 한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설명할 수조차 없는 용맹함이었다. 다른 무슨 말로 표현한다는 말인가……? 이때까지 대학살을 당했음에도 곧장 다음 행동을 취하는 그들에게 로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p.228~229
죽음에 대한 공포도, 생존에 대한 열망도 느끼지 못한 채 산화하면서도 달려드는 구름들을 보며 승무원들은 점차 자신감을 잃어간다. 무엇이 약한 것일까? 무엇이 강한 것일까? 강함과 약함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가장 하찮은 벌레 하나가 가장 거대한 거인을 괴롭게 만든다면 강자와 약자는 누구인가? 인간은 과연 우주로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퍼뜨리고 증명할 만큼 강한 존재인가?
강대하고 위용 넘치는 인류의 격벽과 보호막은 레기스의 낯선 바람을 막지 못한다. 총과 화포는 실체 없는 구름 떼를 허망하게 통과한다. 굳게 잠근 제복과 빛나는 훈장은 엄습해 오는 두려움마저 가리지 못한다. 지구의 기술력과 무기도, 선원들의 용기와 결의도, 함장의 냉철한 판단력도 지금 이 행성에서는 모두 쓸모없을 뿐이다. 무적호는 이제 벌거벗겨진 채로 행성이 주는 시련을 온전히 맞닥뜨려야 한다.
무적無敵
호르파흐는 그 전의 파견에서 유일하게 생존하여 돌아온 자신의 부관 '로한'을 호출한다. 로한은 궁금해한다. 그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을 놔두고 함장은 왜 하필 자신을 부른 걸까. 무적호에 있는 학자들과 비교하면 로한 자신은 평범한 수준의 지식과 경력을 가진 항해사에 불과하다.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랐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로한은 선장이 이미 며칠 전부터 다른 모든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무기력란 상태였음을 알아챘다. 바로 그 순간, 선장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고, 또 으레 그래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흐트러진 옷차림과 너무나 지친 얼굴, 의식하지 못한 채 떨리는 그의 손을 보자 이제껏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령관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p.262~263
함장과 독대하여 자리에 앉는 순간, 로한이 품어왔던 기대와 환상은 무너진다. 언제나 차분하고 결단력 있어 보이는 함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면도도 하지 않은 채 피곤한 얼굴로 일상복 차림을 한 호르파흐는 극심한 스트레스나 긴장 탓인지 손을 떨고 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지친 기색이 가득하다. 제복이 품고 있던 사나이는 없고, 외계의 행성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한 연약한 인간이 그를 마주 보고 있다.
호르파흐는 고백한다. 이 이상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임무를 계속해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구름 떼와의 몇 차례 교전 끝에 과학자들이 알게 된 것은 그것들이 기계와 생물의 전기신호에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실종된 선원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단 한 명의 사람만을 내려보낼 것이다. 어떤 전자장비도 없이, 무기 하나 쥐어주지 않은 채, 뇌파와 생체 전기신호를 가릴 수 있는 차단막을 입고 내려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성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경험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 임무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자원자가 없으면 그대로 무적호는 기지로 귀환할 것이다.
로한은 그때 함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닫는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저마다의 이론과 가설을 내세우며 어떻게 하면 구름을 파괴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을지 논박해 왔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로한처럼 직접 구름을 눈으로 보고 살아 돌아온 경험은 없다. 그들의 논쟁은 추측과 가설 위에 또 다른 가설이 더해져 현실과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승무원들은 사고를 조사하고 사람을 구하는 임무 본연의 목적을 잊고 구름에 대한 분석과 탐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론가들이 전형적으로 늘어놓는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들은 유전적 변화의 종류와 실행 방법, 그것에 대한 실제적 개념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p.242
지금 함선에, 이 순간에 필요한 건 전문가의 이론이나 권위자의 의견이 아니라 실체를 마주하고 겪어본 '경험'이다. 로한은 지난번의 사고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줄곧 자신과 무적호의 임무를 스스로에게 물어왔다. 자의식도 존재하지 않는 기계들, 인간에 대한 적의조차 느끼지 못하는 무정물을 상대로 치욕을 되갚고, 복수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해서 그것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극복하거나 무너뜨려야만 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지표면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수습하고 그들을 기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로한은 이전까지는 함장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던 하급자였다. 명령에 복종하고, 상급자의 권위와 결정을 존중하며 자신의 의견과 사고를 구체화하기보다는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전문가라고 하여, 지위가 높고 학식이 많다고 하여 그 사람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상대로 무의미하고 허무맹랑한 상상을 정답인양 읊고 있다. 지금 호르파흐에게, 무적호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 아닌, 확신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체험과 확신이다.
"그러나 우리 임무는 그것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실종자 네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p.269
로한은 레기스 행성에 홀로 내려가기로 자원한다. 또한 행성에서의 실종자 수색을 계속 수행할 것을 함장에게 제안한다. 구름 떼를 정복하거나, 이곳 행성의 알 수 없는 미지를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진 이들을 위해 노력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호르파흐는 로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함장과 선원의 위계가 아닌, 자신만의 사고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려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받아들인다. 로한은 더 이상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승무원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로한은 두렵고 무섭다. 그를 외계의 행성으로부터 지켜주던 무적호의 갑판과 보호막은 어디에도 없다. 그를 지켜줄 무기라고는 두 팔과 다리 밖에 없다. 위기상황에서 조언을 하고 경고해 줄 동료도 없다. 결정을 책임지고 지원해 줄 함장도 따라오지 못한다.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로한은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 설정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자신만의 경험으로,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만의 책임으로 싸워야 하는 날이 온다.
어느 날, 무적호는 저 멀리 광야에서 함선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간을 발견한다. 그는 고독하고, 지쳤으며, 비틀거린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하늘을 꿰뚫을 듯 빛나고, 그의 다리는 대지를 지탱하듯 결의에 넘친다. 레기스가 던진 모든 시련을 이겨낸 그는 홀로 굳건히 서 있었으니, 진정으로 그는 대적할 자가 없는 '무적'이었다.
글토막
지금 전략가들이 구름을 무찌르고자 계획을 세우고 있으리라 생각하자, 입을 삐쭉거리면서 조소를 머금었다. 모든 게 무의미해……. 그는 생각했다. 전략가들은…… 아니, 실제로 우리, 우리 모두가 그것들을 파괴하길 원해.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아무도 구할 수 없어. 레기스는 무인 행성이고, 사람을 위한 환경이 아니야. (…) 먼저 콘도르호를, 그다음에 우리를 매복 공격한 적군이라고 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질서를 망가뜨리기 위해서 모든 힘과 자원을 낭비할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터득하기에는 너무나 생소하고 놀라운 현상들이 우주에 얼마나 많이 감춰져 있을까? 발 디디는 곳마다 인간의 이해력에 상충하는 모든 것들을 함선의 무력으로 파괴해야 하는가?
p.251